▲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사쓰마번·조슈번의 젊은 무사들. 맨 왼쪽이 이토우 히로부미다. 그도 하급 무사 집안의 자제였다. 이 사진은 1869년에 도쿄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앤드루 고든은 메이지유신을 '좌절한 하위 엘리트층의 혁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무사 중에서도 중하급 무사가 주도했기 때문에 이것을 상위 엘리트층의 혁명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메이지유신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앤드루 고든의 시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타당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은 '무사'라는 측면에서는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년)의 지배층이라고 오해될 여지가 있으나, '하급' 무사라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상층 엘리트에 포함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주도한 서양의 부르주아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양과 재산을 바탕으로 대중에 대해 일정한 지도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봉건시대의 지배층은 아니었다. 그들은 봉건시대의 '중간계층'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
현대 한국의 경우, 고등교육을 받고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나 중소 규모의 교회를 이끄는 목사는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사회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으나, 거시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는 사회의 중간계층 혹은 중간계층의 리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인 하급 무사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메이지유신들의 주역들은 사회변혁을 주도할 만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검'을 보유했고 하층 서민들에 대해 일정한 지도력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서양 부르주아처럼 높은 수준의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검'이라는 무력의 보유·행사를 통해 사회 변화를 주도할 만한 가능성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일본의 하급 무사들은 이전 사회의 중간계층으로서 다음 세대를 주도할 만한 역량을 보유한 서양 부르주아와 유사한 측면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유신을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고 인식하는 앤드루 고든의 시각에 힘을 실어주는 측면이다. 이 말은 물론 경제적 측면을 배제한 상태에서 하는 말이다.
서양의 부르주아와 유사하든 아니든 간에, 확실한 것은 일본의 하급 무사들은 분명히 봉건시대의 지배층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는 군부독재시기(1961~1992년)의 한국에서 군부가 사회지배층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급 장교나 하사관까지 지배층에 포함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기존 사회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하급 무사들이 주도한 혁명이라는 점에서 메이지유신은 분명 '위로부터의 혁명'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보다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메이지유신을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규정하는 전제에서, 그와 같은 '위로부터의 군사문화'가 일제식민통치를 통해 한국에 유입되었고 또 그러한 일제의 유산이 한국 산업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 설득력을 갖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산업근대화의 진정한 원동력이 무엇이었는가에 관한 탐구는 전면적으로 다시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차제에 동아시아 사회의 원동력을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 규명하기 위한 지적 노력 역시 적극적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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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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