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태 소나무. 2백년 되었다는 소나무 수령에 비해 너무 작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박신용철
조선의 법궁 '경복궁'이 있는 광화문 네거리를 지날 때마다 청와대가 들어있는 백악산(북악산)을 바라봅니다. 문화재청은 지난 2일 관보(문화재청 고시 제2007-24호)를 통해 백악산을 '사적 및 명승 제10호'(서울성곽만 국가사적 10호로 정해져 있었음)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백악산이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을 넘어 국가지정문화재로 관리된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찜찜함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아름다운 백악산, 그러나 그 안에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2005년 4월 1일 백악산 개방에 앞서 시민사회단체·학계·정부 관계자들을 초청해 사전 개방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숙정문이었습니다. 사람의 손때가 타지 않아서인지 서울성곽의 모습도 아름다웠습니다.
국가사적 제10호 서울성곽(1963.01.21 지정)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있던 덕분에 역사적 흐름이 아로새겨져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백악산에서 내려다본 세종로는 장관이었습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과 함께 육조거리가 있었던 길은 조선시대 계획도시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서울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곡성'의 아름다움은 다른 곳에 위치한 서울성곽에서 볼 수 없는 멋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숙정문은 조선 태조 5년(1396년) 창건되었으며 연산군 10년(1504년)에 원래 위치에서 약간 동쪽인 지금의 자리로 이건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숙정문을 위시한 백악산 일대는 1968년까지만 해도 산책이나 등산이 자유로웠습니다.
| | | 1·21 김신조 사건이란 | | | |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임진강을 건너고 청와대 뒷산인 백악산(북악산)까지 침투한 사건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사건 이후 김신조 침투로 일대에 군부대를 상주시키거나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침투로 중 민통선 일대에는 지뢰를 집중매설하기도 했다.
김신조 일행은 1월 18일 자정 휴전선을 넘었고 미군이 직접 주둔했던 비무장지대 서부전선을 지나 19일 결빙된 임진강을 건넌다. 그리고 경기도 고양군 법원리(현재 경기도 파주시 법원) 삼봉산에서 숙영을 한 후 20일 북한산 비봉 승가사로 이어지는 산길을 타고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김신조 침투로에 대대적인 병력을 주둔, 강화시켰다. | | | | |
이 곳이 통제된 것은 1968년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발생한 1968년 '1·21 김신조 사건'이 그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강하게 받았던 박정희는 백악산 일대를 군사보호구역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런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명승사적 내에 스며든 반공 이데올로기의 표식이었습니다. '1·21 김신조' 사건때 총격전을 벌였던 흔적이라며 '1·21 사태 소나무'라는 푯말이 세워진 소나무가 서있습니다. '김신조 일당과 총격전을 벌인 흔적'이라며 탄흔 자국에 흰색 페인트를 칠해놓고 말입니다.
1·21사태 소나무
'청와대를 습격하여 침투한 김신조 외 30여명이 경찰과 군대와 접전을 벌이다가 습격에 실패, 북악산 방향으로 도주 매복 중이던 2중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였음. 수령이 200년이 된 이 소나무는 당시 이 지역에서 치열했던 상황을 증명해 주듯 15발의 탄흔이 남아있으며 김일성 도당의 잔악성에 대한 경각심을 부여하고 우리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간직한 채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이 소나무는 장병들로 하여금 특정지역 경계근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실증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