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하이에나가 함께 사는 비밀의 도시

[내가 만난 아프리카 22] 끝내 참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수수께끼같은 하라르

등록 2007.04.08 16:23수정 2007.07.10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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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르 숙소 창문 틈에서 찍은 하이에나 출몰 장소. ⓒ 김성호

인간과 하이에나가 맺은 무언의 평화조약

오후에 하라르 성곽도시 탐방을 마친 뒤 숙소로 돌아와 쉬다가 저녁을 먹고 이빨을 닦으려 하니 숙소의 물이 아예 나오지 않는다. 결국 숙소의 식당에서 생수를 한 병 사서 이빨을 닦고 헹구어야 했다. 이처럼 여행객 숙소에도 저녁에는 물이 안 나올 정도로 하라르의 물 부족 현상은 심각했다.

저녁 7시쯤 택시를 타고 야생 하이에나에게 먹이를 주는 현장으로 갔다. 하라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구경이 바로 하이에나 먹이주기. 밤이면 시내로 찾아오는 하이에나에게 사람이 직접 고기를 먹여주는 놀라운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장소는 에레르 문과 산가 문 사이의 성곽 밖.

택시 운전사는 "하이에나는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지만, 야생 하이에나에게 사람이 먹이를 주는 장면은 하라르에서만 볼 수 있다"고 자랑했다. 매일 하이에나에게 먹이를 주는 장면이 마치 관광 상품처럼 여행객에게 공개된 것은 40여 년 밖에 안 되었지만, 하라르에서는 700∼800년 전부터 이와 비슷한 하이에나에게 먹이주기 의식이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오랜 옛날 하라르 지역에 심한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 사라지자 하이에나가 사람을 공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하이에나에게 죽을 끓여주자 하이에나의 공격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지금도 이슬람력으로 정월에 이뤄지는 모하람 축제의 7번째 날에 하라르 지역에서는 하이에나에게 죽으로 만든 특별한 먹이를 주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하라르 주민들과 하이에나는 무언의 평화조약을 맺은 셈이다.

하이에나에게 먹이주기는 인간과 동물이 맺은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이 아닐까. 굶주림이 심한 지역에서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기 위한 하라르 주민들의 지혜인 셈이다. 인간을 해치는 하이에나를 말살시키지 않고 먹이를 줌으로써 달래면서 공존을 택한 하라르 주민들의 동물보호와 환경보호에 대한 선견지명에 놀라울 따름이다.

성황당 같은 하이에나 먹이 주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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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나에게 먹이를 주는 아오운사리 이슬람 신사.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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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나에게 줄 낙타가죽을 자르는 아이들. ⓒ 김성호

하이에나 먹이주기는 이처럼 단순한 관광 상품이나 쇼가 아니라 하라르 주민과 동물 사이의 공존의 철학이 들어 있는 일종의 전통이고 인류문화이다. 저녁 7시 20분쯤 하이에나 먹이주기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리고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커다란 느티나무 같은 당상나무가 있고, 나무 밑에는 지붕 위에 초승달과 별 모양이 달린 성황당 같은 작은 이슬람 성소가 꾸며져 있었다. 바로 아오운사르 신사. 여기서 에레르 문을 지나 조금만 가면 성 밖에 한센병 환자 집단거주지가 있다. 나병 또는 문둥병이라고도 불리는 한센병에 대해서는 가까이만 가도 전염된다는 잘못된 미신으로 이곳 사람들도 여전히 가기를 꺼리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 시골길 중에서도 어두운 밤에 가장 무섭고 오싹하게 하는 곳이 성황당과 상여집이 있는 당상나무 고개. 성황당에서는 귀신이 뛰어나올 것 같고, 당상나무 위에서는 유령이 하얀 옷을 두르고 내려와 덮칠 것만 같은 두려움과 공포감에 머리가 쭈뼛쭈뼛 솟는다. 성황당 길이 더 무서운 것은 그 옆에 사람이 죽어 장례를 할 때 주검을 넣는 관을 싣고 가는 상여 틀을 보관하는 상여집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하이에나 먹이 주는 장소는 바로 성황당 같은 이슬람 무덤이 있는 당상나무 밑이다. 택시운전사는 "밤에 이곳에 오는 것은 하이에나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바로 옆에 하이에나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이 사는 곳을 비롯해 몇 채의 민간인 집이 있었다. 대문으로 들어가 보니 10대 초반의 어린이 2명이 하이에나에게 줄 고기를 부엌칼로 자르고 있었다. 하이에나에게 먹이를 주는 집주인의 아들이고 한다.

무슨 고기냐고 물으니 아이들이 "낙타 가죽"이라고 말한다. 하이에나에 주는 먹이는 낙타고기, 그것도 주로 낙타 가죽이었다. 택시운전사는 "낙타고기는 주로 낮에 하라르 시내의 푸줏간에서 공짜로 걷어 온다"며 "이슬람교도는 술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대신, 커피와 차, 양고기, 낙타고기 등은 좋아한다"고 말했다. 낙타고기는 하라르에서 비싼 값에 팔린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하이에나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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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하이에나 무리(위 사진)와 먹이주는 사람 옆에 몰려든 하이에나(아래 사진). ⓒ 김성호

유럽 여행객 3명이 뒤이어 도착하고, 총을 든 남자 1명과 여자 1명의 에티오피아 보안요원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현장에 도착하자 먹이주기가 시작되었다. 저녁 7시 50분께 낙타 가죽 먹잇감이 든 노란 통을 한 손에 들고 집주인이 나왔다.

주인이 "휘∼익, 휘∼익" 휘파람소리를 내자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검은 물체가 유령이 다가오듯 당상나무 아래로 살금살금 다가왔다. 검은 물체가 다가오면서 어둠 속에 오싹한 한기도 몰고 왔다. 놀랍게도 커다란 점박이 하이에나 한 마리였다.

택시 전광등에서 비추는 불빛이 하이에나의 눈에 반사되어 어둠을 뚫고 필살기의 빛으로 되돌아왔다. 전깃불이 없다 보니 여행객이 타고 온 택시 전광등을 켜서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커피색의 점박이 두 마리가 더 나타났고, 몇 분이 안 되어 15마리나 되는 하이에나 집단이 몰려들었다.

어둠을 장벽으로 주변에 숨어 있던 하이에나 무리의 우두머리가 친근한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신중하게 척후병으로 먼저 다가왔던 것이며, 휘파람 소리의 주인이 사냥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뒤 무리에게 신호를 보내자 숨어 있던 나머지 하이에나 떼가 한 마리씩 얼굴을 드러낸 것. 하이에나의 경계심과 신중함을 볼 수 있다.

먹이를 주는 사람의 이름은 물루게타 월데 마리암이라는 중년의 남자. 그는 다가온 하이에나에게 마치 친구의 이름을 부르듯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어인 하라리어로 부르고 있었다. 몸의 특징에 따라 하이에나에게 고유의 이름을 붙여 구분하고 있다고 한다.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아프리카어로 '안녕'이라는 뜻의 "잠보"라는 소리만 들리는데, 운전사 겸 안내자에게 물어보니 각각의 하이에나에게 '승리자', '큰 암컷', '우두머리' 등의 뜻을 가진 이름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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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기에 먹이를 끼워 하이에나에게 주는 장면(위 사진)과 막대기를 입에 물고 하이에나에게 먹이를 주는 장면(아래 사진). ⓒ 김성호

노란 통에서 자신의 아들이 미리 자른 낙타 가죽을 손으로 잡은 막대기에 끼워서 하이에나에게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 한 마리씩 먹이를 주던 남자는 대여섯 마리의 하이에나가 한꺼번에 달려들자 낙타가죽 고기를 멀리 던져 하이에나 떼를 흩어지게 했다.

가장 놀라운 장면은 입으로 하이에나에게 먹이를 주는 순간. 물루게타가 20㎝가 채 안 되는 짧은 나무 막대기 끝에 낙타 가죽고기를 끼운 뒤 다른 쪽 막대기를 자신의 입으로 물고 있자 하이에나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다가왔다. 멈칫거리던 하이에나 무리 중 가장 덩치가 큰 놈이 물루게타에 더욱 가까이 접근한다.

하이에나가 혹시 먹잇감을 물다 물루게타의 얼굴마저 날카로운 이빨로 핥지 않을까 여행객의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여행객들이 숨 쉬는 것을 멈추자 잠시 침묵이 흐르고 순간적인 공백상태에 빠져든다. 덩치 큰 하이에나는 한발 한발 다가서더니 막대기 끝에 있는 낙타 고기만을 입으로 낚아채더니 획 돌아섰다. 여기저기서 "휴우∼" 하는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여행객에게도 하이에나 먹이 주는 기회를 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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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나에게 먹이주기를 시도하는 나. ⓒ 김성호

하이에나가 먹이를 먹는 장면을 비추기 위해 택시 전조등을 켜고,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플래시를 터트려도 하이에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먹이에만 집중했다. 물루게타의 먹이 주기가 끝나자 다음에는 여행객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운전사가 나에게도 한번 해보라고 부추긴다. 용기를 내어 하이에나에게 먹이를 주러 다가갔는데 막대기의 고기 대신 더 큰 먹잇감인 나를 덮치지 않을까 내심 떨리는 가슴을 감출 수는 없었다. 내 자세부터가 엉성하다. 물루게타처럼 앉아서 먹이를 주지 못하고 하이에나가 덮치면 도망갈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엉덩이를 뒤로 쑥 뺀 엉거주춤한 자세로 막대기만을 하이에나 쪽으로 쑥 내밀었다.

이 정도로나마 내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총을 들고 지켜보고 있는 보안요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나면 보안요원들의 총이 도와주지 않겠느냐는 내 나름의 마지막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 다행히 하이에나는 막대기 끝에 매달린 낙타 고기만을 낚아채고, 막대기를 쥐고 있던 내 손은 그대로 돌려주었다.

젊은 안내자의 말처럼 세계에서 야생의 하이에나에게 먹이를 주는 것은 하라르가 유일하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하면 반드시 봐야 할 장면이다. 더욱이 직접 하이에나에게 먹이를 주는 경험은 여행객으로서는 아찔하지만 짜릿한 경험이다. 하이에나 먹이주기는 40여 분 정도 진행되다 저녁 8시 30분께 끝났다.

숙소에서 창문을 열고 몰래 바라보는 하이에나 사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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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자 쓰레기 하치장에 모여드는 독수리들. ⓒ 김성호

하이에나 먹이 주는 행사가 끝난 뒤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몸을 뒤척이는 데 창문 틈을 통해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와 함께 아주 기분 나쁜 느낌이 몰려왔다. "낄∼낄∼"하는 어린아이 웃는 소리 같기도 하고, "킁∼킁∼"하는 코로 냄새 맡는 소리 같기도 하다.

방문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건너편 운동장 공터를 바라보니 하이에나 떼가 보였다. 모두 5마리의 하이에나가 공터의 쓰레기하치장에서 음식 찌꺼기를 뒤지며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안달이었다. 이슬람 신사의 하이에나들은 실컷 먹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테니까 이곳에 와 있는 하이에나들은 물론 다른 것이다.

쓰레기하치장에서 한참을 뒤적이던 하이에나들은 먹이가 떨어졌는지 이번에는 하치장과 내 숙소 사이에 있는 작은 개울물이 흐르는 계곡 밑으로 내려와 코를 땅에 대고 킁킁거리고 다녔다. 내가 묵은 숙소는 신관 17호였는데, 하이에나의 출몰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곳.

당연히 다른 방보다 두 배나 되는 숙박료인 70비르(8400원)를 내야 했다. 몰래 숨어서 하이에나 구경을 하는 셈이어서 두 배의 숙박료는 결코 아깝지 않다. 심야의 하이에나 사파리라고 할 수 있다. 어디서 어두운 밤에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이런 생생한 야생동물을 몰래 볼 수 있겠는가.

방에서 하이에나가 출몰하는 쓰레기하치장까지는 10m 정도의 가까운 거리. 하이에나 출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방이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좋아 너무 몰리자 주인은 아예 수시로 방 번호를 변경하곤 한다.

하이에나가 출몰하는 운동장 공터 쓰레기하치장은 낮에는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이 축구를 하는 놀이터이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인 오후 5시쯤에는 독수리 떼가 날아와 하치장 위에 드러나 있는 음식 찌꺼기를 일차로 맛을 보고 어둠이 몰려오기 전에 서둘러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밤 10시가 되어 어둠이 사람과 독수리를 완전히 몰아내면 제일 늦게 찾아오는 밤의 청소부가 바로 하이에나.

하이에나 떼가 몰려가는 것을 보고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개 짖는 소리에 다시 잠을 깼다. 한 마리의 개가 짖자 육상경기의 400m 이어달리기하듯 바로 옆집의 개에 이어 건넛집 개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잇따라 더 큰 소리로 짓기 시작했다. 개 짖는 소리에 놀란 듯 숙소 옆에 있는 양철 지붕의 허름한 판잣집에 사는 아기도 울기 시작했다.

개 짖는 소리는 바로 하이에나가 출몰했다는 신호. 개는 예민한 후각과 청각으로 하이에나의 출몰을 알아챈다. 하라르에는 개를 기르는 집들이 많은데 바로 하이에나를 내쫓기 위한 것이다. 배고픈 하이에나는 밤에 마을로 몰래 들어와 염소와 낙타 등 가축을 잡아먹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는 냄새로 분별하는 후각이 사람의 10만 배에서 10억 배이고, 청각은 인간보다 4배나 먼 거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최첨단 레이더망. 밤이 되면 슬금슬금 민가로 침입해 들어오려는 하이에나도 잠에 곯아떨어진 사람의 눈과 귀는 피해갈 수 있어도, 최첨단의 코와 귀로 무장한 개의 레이더망은 피해갈 수 없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창문의 커튼을 다시 여니 7∼8마리의 하이에나가 쓰레기하치장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새로 먹이를 찾아 침입한 하이에나 무리이다. 하라르에서는 매일 밤새도록 이처럼 하이에나들이 교대로 먹이를 찾아 시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낮에는 근처 야산에 숨어 있다 밤이 되면 스멀스멀 무단침입자가 된다.

코란 낭송 대신 괴이한 합창소리에 잠 못 이루는 하라르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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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자 운동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쓰레기 하치장 옆 운동장. ⓒ 김성호

굶주린 하이에나 떼의 쓰레기 헤집는 소리와 여기저기 개 짖는 소리, 아기의 놀란 울음소리가 뒤섞인 하라르의 밤은 음습하다. 도둑이 들 것 같아 잠 못 이루는 랄리벨라의 밤이 주는 공포감과는 사뭇 다르다. 이슬람 도시여서 밤새 코란 읽는 소리를 들으며 편안한 잠자리를 기대했으나 코란 낭송은 들리지 않고, 하이에나와 개, 그리고 아기 울음소리의 괴이한 합창소리만이 귓전을 때린다.

새벽에 날이 밟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쓰레기하치장이 있는 운동장에는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이 아침 운동을 하고 밤새 짓던 개들이 뛰어나와 놀고 있었다. 하라르의 운동장은 낮에는 사람과 개, 저녁 무렵에는 독수리, 어두운 밤에는 하이에나가 차지하는 인간과 새, 동물이 시곗바늘에 따라 공존하는 묘한 공간이었다. 하이에나의 출몰과 옛 성곽도시의 적막감이 더해져 밤이면 인적이 끊어지는 하라르의 밤은 어둠의 도시 그 자체였다.

하이에나와 함께 밤을 지새운 뒤 나는 다음날 아침 하라르를 떠나야 했다. 아디스아바바로 되돌아가기 위해 디레다와에서 낮 12시 30분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숙소를 나오는데, UN(유엔) 로고 표시가 있고 그 밑에 WFP(세계식량계획)라고 쓰인 랜드로버 차량이 기다리고 있다가 숙소에서 나오는 한 중년남성을 태우고 갔다. 아마도 유엔 직원도 나와 같은 숙소에서 묵었던 모양이다.

시간에 쫓기는 버스 안의 교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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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자 운동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개. ⓒ 김성호

오전 9시쯤 일찍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디레다와 가는 봉고버스에 올라타니 승객이라고는 아무도 없다. 운전석 바로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다른 승객이 타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은 흘러가는 데 좌석은 여전히 텅 비어 있다. 승객이 타지 않으니까 차가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버스의 출발 기준은 정해진 시각이 아니라 빈자리를 꽉 채우는 탑승인원이다. 최소한 비행기 출발 두 시간 전인 오전 10시 30분에는 디레다와 공항에 도착해야 하는 나로서는 이미 출발해도 늦은 편이었다. 하라르에서 디레다와까지는 빨리 달려야 최소한 한 시간.

내 옆자리 한 자리가 여전히 비어 있자 오전 10시 10분이 되었는데도 차는 출발하지 않고 시동만 건 채 마냥 기다리고 있다. 비행기에 쫓기는 내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져만 간다. 더는 참을 수 없던 내가 비행기 시간에 맞추려면 빨리 출발해야 한다고 했지만, 운전사는 "빈자리의 요금을 지불하면 출발할 수 있다"며 턱을 괸 두 손을 운전대에 올려놓고 천하태평이다.

결국 내가 운전사에게 지고 말았다. 빈자리의 요금을 추가로 부담하기로 하고 차를 출발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팔 수밖에 없는 법이다.

솔직히 웃돈을 내야한다는 아쉬움보다는 버스가 출발하자 이제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승객이 꽉 차야 출발하는 아프리카 버스에서는 이처럼 예상할 수 없는 당혹스런 일도 일어난다. 비행기 탑승의 경우에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염두에 둬야 한다.

끝내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비밀의 도시 하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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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하이에나가 나타나는 운동장 옆 쓰레기하치장과 테우오드로스 호텔. ⓒ 김성호

하라르는 여행객으로서 단지 하룻밤의 인연일 뿐이지만, 떠나올 때까지 많은 추억을 남겨준 도시였다. 150여 년 전 하라르를 방문했던 리처드 버튼은 버스 때문이 아니라 성곽 출발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며칠간 사실상 성곽 안에 잡혀 있어야 했다. 리처드 버튼은 허락을 받고 간신히 성곽을 빠져나가면서 "아프리카의 모든 도시들은 들어올 때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들어오지만, 나갈 때는 다른 사람의 의지에 의해 떠날 수 있는 대규모의 교도소"라고 표현했다.

나는 봉고버스 안에 갇혀 있으면서 어쩌면 이렇게 리처드 버튼이 적절한 표현을 사용했을까 감탄했다. 나에게 역시 하라르는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버스 안의 교도소'였다. 나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시간에 쫓기면서 버스 안에 포로로 갇힌 신세였기 때문이다.

인간과 하이에나, 개와 독수리,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하면서도 오래된 성곽의 적막감이 어쩐지 우울한 것 같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차트를 씹으면서 공복감을 달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환각상태의 공허함,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의 전통으로 여행객에 대해 여전히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고 있는 듯한 주민들의 표정들, 무엇인가를 감추려는 듯한 하라르의 야릇한 분위기….

뭔가를 보지 못하고 떠난다는 여행객의 아쉬움이 남는다. 아프리카 여행 중 하라르처럼 나에게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곳은 없었다. 아니면 내가 참모습을 못 본 것일까. 하라르는 끝내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고, 비밀의 도시였다.

11년 동안이나 살다 하라르를 떠나던 랭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인생이 단 한 번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사실"이라고 랭보는 말했다. 랭보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 하라르는 리처드 버튼에게도, 랭보에게도, 더욱이 하룻밤 스쳐가는 나그네 여행객인 나에게도 끝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1년이 13개월인 에티오피아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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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레다와 비행장과 쌍발 프로펠러 여객기. ⓒ 김성호

뒤늦게 출발한 버스는 비행기 출발 30분 전인 낮 12시에 디레다와 공항에 간신히 도착했다. 다행히 낮 12시 30분발 비행기가 지연되어 오후 2시에 이륙하는 바람에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디레다와 공항에는 커다란 관광포스터에 에티오피아 관광청의 이름으로 에티오피아 민속 의상을 입고 활짝 웃고 있는 여인의 얼굴과 함께 "13 months of sunshine(13개월의 햇빛)"이라는 표어가 내걸려 있었다.

'13개월'이란 에티오피아의 달력은 1년이 12개월로 되어 있는 다른 나라와 달리 13개월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는 보편적인 신태양력인 그레고리오 달력이 아닌 이집트의 고대 콥트력의 영향으로 한 달을 30일로 고정하는 구태양력인 율리우스 달력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1년이 365(또는 366일)인 것은 똑같은데, 1개월을 30일로 고정하는 율리우스 달력에 따라 12월 30일 이후에 남는 5(6)일을 13월로 따로 표시하는 것이다. 에티오피아에는 우리의 달력에 없는 13월 1, 2, 3, 4, 5 (,6)일이 더 있는 셈이다.

에티오피아 정교에서는 또 예수의 탄생을 서기(A.C.) 1년이 아니라 서기 7년으로 보기 때문에 에티오피아 달력은 다른 나라의 그레고리오 달력보다 7년 8개월 늦다. 내가 악숨을 방문했던 날은 2006년 6월 18일인데, 그날 저녁 전통음식인 인제라와 양고기, 레드와인을 먹었던 식당에서 발행해준 영수증에는 1998년 10월 11일로 되어 있었다. 지난 2000년 1월 1일 우리는 새로운 밀레니엄(천년)을 맞이했으나 에티오피아에서는 2007년 9월 11일이 되어야 밀레니엄 행사를 갖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

그러나 공항이나 외국 여행객이 많이 이용하는 호텔 등지에서는 보편적인 그레고리오 달력을 사용하고 있었고, 현지인들의 일반 달력에도 에티오피아 전통 달력과 함께 그레고리오 달력을 함께 기록해 놓고 있었다. 옛날 우리가 달력에 양력과 음력을 같이 표시하는 것과 같은 셈.

아디스아바바로 오는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는 좌우로 요동치고, 갑자기 하강하는 등 마치 곡예비행을 하듯 심하게 흔들렸다. 디레다와와 하라르를 가른 체르체르 산맥의 정상과 계곡을 따라 비행기도 오르락내리락했다. 아디스아바바 공항에 내리자 안도의 한숨이 나올 정도로 심한 비행기의 요동으로 고생했다.

숙소인 우트마 호텔로 와서 짐을 풀고 쉬다가 저녁에는 바 형식의 술집에 가서 맥주를 한잔 마셨다. 에티오피아에서의 모든 여행일정을 마쳤기 때문에 홀가분하다. 작은 술집에는 레게 음악뿐 아니라 팝송도 흘러나왔는데, 대부분 조용히 맥주를 마시면서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하라르 #하이에나 #디레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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