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게가 <마지막 잎새> 그 낙엽 같아"

'구멍가게 인생' 최영한 할아버지가 본 '경쟁과 시장 논리'

등록 2007.04.06 01:35수정 2007.07.10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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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대학 강의시간 혹은 각종 매체를 통해 익히 들어온 경제이론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딱딱한 원서 속에서 발견한 신자유주의는 어디까지나 학문적 정의에 불과하다. 교수조차 신자유주의의 양면성을 현실 속에서 체득한 사람은 아니다.

결국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들은 어디까지나 '대학과 학문'이란 상아탑 굴레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 문제를 설명하고 검증하기 위한 이론적 합리성과 논리도 중요하지만, 어딘가 대중과 동떨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진정한 깨달음은 '현실 속의 삶'에서 나오는 법이다. 잠깐 신자유주의에 대한 학문적 논의를 벗어나, 15년간 서울 천호동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최영한(76) 할아버지를 찾아가 서민들이 현실의 삶 속에서 느끼는 '신자유주의'란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구멍가게 할아버지가 몸으로 느낀 '경쟁논리'

최영한 할아버지가 15년째 운영하고 있는 구멍가게 모습. 그는 '신자유주의'란 학문적 용어는 몰랐지만, 누구보다도 현실에서 느끼는 서민들의 어려움과 아픔에 대해 잘 설명해 주었다(최영한 할아버지 사진은 본인이 극구 촬영을 사양한 관계로 기사에 담지 못했습니다).
최영한 할아버지가 15년째 운영하고 있는 구멍가게 모습. 그는 '신자유주의'란 학문적 용어는 몰랐지만, 누구보다도 현실에서 느끼는 서민들의 어려움과 아픔에 대해 잘 설명해 주었다(최영한 할아버지 사진은 본인이 극구 촬영을 사양한 관계로 기사에 담지 못했습니다).손기영
지난 5일 찾아간 최영한 할아버지의 구멍가게는 그 흔한 간판도 없는 10평 남짓한 공간의 소규모 슈퍼마켓이었다.

할아버지는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정정했고 평소 가게에서 시간이 날 때 틈틈이 독서를 한다고 했다. 요즘 장사는 잘 되느냐고 질문하자, 할아버지는 자신의 구멍가게를 '낙엽'에 비유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한때는 나름대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 수 있었지. 그런데 IMF란 풍파가 닥치고 대형할인마트와 편의점들이 들어서면서 내 처지와 비슷한 구멍가게들이 생명력을 잃어갔어. 결국엔 주변의 구멍가게들은 떨어지는 낙엽과 같이 장사를 접게 됐고, 내 가게가 마지막 잎새처럼 간신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지. 이것을 바라보고 있는 내 심정은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과 같아."

실제로 할아버지의 이름없는 구멍가게 주변엔 '이마트'와 'GS25', '바이더웨이' 등 각종 대형유통업체와 대기업 편의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는 영세 점포들의 몰락에 대해 이렇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IMF 때부터 동내 곳곳에 편의점들이 들어서게 됐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시 금리가 낮은 은행에 돈을 넣어봤자 이익이 안 생기니깐 일부 여유있는 사람들이 종자돈으로 이곳에 와 체인점 형식의 편의점들을 여기저기 세웠더군. 지금 동네에서 목 좋은 곳은 그 사람들이 운영하는 편의점들이 다 차지해 그나마 찾던 오랜 단골들도 이제는 거의 찾아오지 않아."

게다가 대량으로 물건을 주문해 싸게 파는 이마트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자신과 같은 구멍가게들은 원체 물건을 조금씩 사와서 가격을 맞출 수 없어 주변사람들에게 '비싼 가게'로 인식된다고 한다.

결국 동네 편의점에 둘러싸인 채 이마트에 한 방 먹고 나가떨어진 꼴이 됐다며, 소규모 점포의 몰락은 '경쟁과 시장 논리'를 앞세운 대형할인마트와 편의점들이 부추겼다고 할아버지는 강조했다.

"나갈 구멍 없기에 구멍가게 인생살이..."

수도권의 한 대형마트 매장(자료사진).
수도권의 한 대형마트 매장(자료사진).오마이뉴스 남소연
할아버지는 예전에 사람들이 왜 자기가 태어난 대한민국을 등지고 저 멀리 타국으로 떠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 그 이유를 조금씩 알 수 있겠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땅도 좁은데 기회도 없어. 나도 예전에 장사가 안 돼 이 일을 접고 그릇 장사나 옷 장사를 새로 시작해보려고 했는데, 이것도 저 큰 이마트 안에 다 있는 것이더라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100원 쓰더라도 10원은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구멍가게를 계속 해오는 거야."

최영한 할아버지는 신자유주의의 최대 미덕인 '경쟁과 시장 논리'가 결국 풍부한 자본력으로 무장한 대형업체에 유리하게 작용되며, 이는 영세 서민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점포들을 결국 몰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최 할아버지는 "지금의 현실이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흐름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이러한 문제가 생기기 전에 정부에서 서민들에게 대비책을 먼저 제시하고 다른 돈벌이 수단을 마련해줬어야 했다"고 항변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얼마 전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지었다는 '구멍가게 인생'이란 시 한 편을 들려주었다.

수많은 사연에 얼룩져 헤매 도는 만신창이
이것도 해도 저것도 안 되는 내 인생
나갈 구멍 없기에 구멍가게 인생살이
가여운 찰라 못난 인생인 걸
어쩌나 기왕에 내친 길
부에 억눌리지 말고
재생의 희망 탑을 세워보세


신자유주의는 갖은 고생을 다해 마련한 할아버지의 마지막 희망을 '경쟁과 시장 논리'로 재단하고 있었다. 최영한 할아버지의 15년 된 구멍가게 위기와 그의 목소리는 누구보다도 신자유주의의 비정함을 절실히 알게 해준 기회였다.
#신자유주의 #구멍가게 #시장논리 #경쟁 #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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