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류작가 3인의 '세 가지 맛' 이야기

[서평] <빠지다>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시트> <하루가 떠나면>

등록 2007.04.07 12:26수정 2007.04.0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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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생 가와카미 히로미의 <빠지다> - 속 깊은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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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드림

가와카미 히로미(川上弘美)는 생물학을 전공하고 5년간 교편을 잡았다가 1994년 파스칼 단편문학 신인상을 받은 <신>이란 단편으로 등단했다.


<빠지다>는 1999년에 선보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녀에게 제115회 아쿠다가와상을 안겨줬다. 아쿠다가와상은 일본 최고 권위의 신인문학상이다.

<빠지다>의 원제는 <溺れる>다. 익사의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행간이 깊다. 아무 생각 없이 읽다가 행간 속으로 어쩌면 익사해 버릴지도 모르는, 다소 염세적인 분위기가 깔려있다.

때로는 진부한 현실에 대한 반복 같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몽환적인 분위기가 첨가되면서 규정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독자를 몰입시킨다. 한마디로 난해하다.

히로미의 소설은 주로 한쌍의 남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이 주고받는 일상적인 언어-때론 선문답 같은-속에서 자아 정체성을 드러낸다. 다분히 이기적인 언어들의 유희지만 작가는 그것의 원인제공자를 부조리한 사회라고 은유한다.

표제작 '빠지다'에 등장하는 모우리와 고마키. 이들은 '얼마 전'부터 도망치고 있는데, 고마키는 그 이유를 모른다. 모우리는 여러 가지로부터 도망하지만 그중 특히 부조리한 것으로부터 도망한다는 소리에 그저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다.

이 둘의 대화와 생각은 철로처럼 평행선을 긋지만 끝까지 둘만이 도망치고 있다. 10분마다 흔들리는 철길 옆 작은 다다미방에 누워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두 남녀. 이들을 도망이라는 막장으로 몰고 간 부조리는 과연 무얼까. (오유리 옮김, 두드림 펴냄, 187쪽, 8200원)


68년생 모리 에토의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시트> - 따뜻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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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공사

모리 에토(森繪都)의 글은 따뜻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시선에 들어 온 피사체는 온기 있는 뇌를 거쳐 따뜻한 손끝으로 빠져 나온다. 활자에서 김이 모락거리는 듯하다. 그래서 글이 맛있다. 따뜻한 글은 맛있다는 공식으로 정리되는 책이다.


에토 역시 일본에선 유명한 작가다. 아동문학을 많이 쓴 것이 시각의 온기를 담보할 수 있는 저력인 듯싶다.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1990년 <리듬>으로 고단샤 아동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했다.

따스하면서도 힘차고 깊이 있는 작품 세계로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일본 문단의 평이다.

표제작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시트'는 국제기구에 근무하면서 국제 결혼한 한 쌍의 부부 이야기다. 상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도전에서 사랑, 그리고 존경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렸다.

국제기구 특성상 오랜 시간 떨어져 근무하면서 느껴지는 새삼스러움. 그 애틋함과 맞닥트리고 있는 또 다른 환경이 주는 간절함 사이의 간극.

안전한 도쿄 시내에서의 삶을 사는 여자와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 지역만 골라 근무하게 되는 남자가 느끼는 삶의 질. 그 질은 안전과 불안전, 풍요와 빈곤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로 규정되는 것임을 일깨워 주는 책이다.

안전과 풍요 속에 머물던 여자에게 전해지는 남편의 죽음.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밝혀진 남자의 죽음 속에 담긴 숭고함. 그때서야 남자가 그토록 갈망했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 여자.

마지막 순간 아프가니스탄을 자원하는 여자의 힘찬 목소리에 울컥하고 울음이 터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긴 여운…. (김난주 옮김, 시공사 펴냄, 422쪽, 1만1000원)

79년생 아스카이 치사의 <하루가 떠나면> - 살아 있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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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랜덤하우스코리아

아스카이 치사가 데뷔했을 때 일본 문단은 떠들썩했다. <하루가 떠나면>으로 스바루 신인문학상을 거머쥐면서 그녀에게 쏟아진 찬사는 "따뜻한 시선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젊은이들의 고통과 희망을 그려냈다"는 것이었다.

이혼 가정 남매와 하루라는 개를 통해 그려진 한 일본 가정의 소소한 삶. 일상적이지만 모든 '가정과 몽환'이라는 기름을 빼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건전한 희망을 이야기한 소설이다. 앞서 두 작가의 작품집은 단편집이지만 이 책은 장편이다. 그래서 맛을 음미하기가 쉽지 않다.

14년 전 공원에서 주워져 어린 남매에게 길러 진 하루. 이혼 가정인 만큼 남매에게 하루는 가족, 즉 부모 또는 형제의 개념이다. 또한 결손가정에서 오는 자기방어와 그로 인한 외부와의 일정한 단절. 하루는 그것을 풀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셈이다.

외부와의 소통의 통로인 하루가 떠난다면? 부인하고 싶은 현실과 마주친 남매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줄기다.

소외와 단절을 이야기하고 소통과 연결을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심금을 울리는 잔잔한 살아있는 이야기다. 따지고 보니 하루는 참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남기고 갔다. 애견가들은 심하게(?) 공감할만한 책이다. (양경미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296쪽, 1만 원)

하루가 떠나면

아스카이 치사 지음, 양경미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빠지다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오유리 옮김,
도서출판두드림, 2007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시공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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