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후 명동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이 거리에 명동을 사랑했던 예술가들이 찾아 오면서 명동은 다시금 예술의 거리로 활기를 되찾게 된다.EBS
그렇다면 명동백작 이봉구(1916~1983년, 소설가)를 기억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그는 196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당시 ‘예술의 메카’였던 명동을 아우르며 수많은 예술가와 교류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생전에 출간한 다섯 권의 창작집 중 세 권의 책제목에 ‘명동’이 들어갈 정도로 그에게 있어 명동은 창작의 본거지이자, 영원한 예술공간으로의 노스탤지어였다.
사소설에 가까운 그의 저서 <명동백작>이 EBS에서 같은 제목으로 극화된다고 했을 때, 적잖은 사람들이 환호했다. 당시 예술인들의 세태를 조망해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산업화와 함께 과밀화되면서 지워진 명동의 옛 모습, 낭만이 가득했던 그 예술의 공간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이창용 PD는 “지금은 유행의 메카이자 패션의 거리로 변해버린 명동에서 옛 모습을 찾기란 하늘에 별찾기”라면서 “그 이전, 한국전쟁 후 상실의 거리가 다시금 예술의 거리로 변모할 수 있었던 당시 명동의 공간들을 짚어보겠다”며 강의를 시작했다.
문인들이 명동 다방을 기웃거렸던 까닭은?
서정주 시인, 김수영 시인, 박인환 시인, 전혜린 수필가, 송범 무용가, 김백봉 무용가, 임만섭 성악가, 김동원 연극배우, 임춘앵 국극배우, 이중섭 화가 등 당시 명동을 제집 드나들 듯 했던 예술가의 이름만 살펴보아도 당시 명동이 어떤 의미의 공간이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명동에 그토록 수많은 예술가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당시 유일한 종합예술공연장이었던 ‘시공관’(구 국립극장)이 명동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봉구가 “우리나라 문화가 다 들어가 있다”고 말한 ‘시공관’은 1934년 ‘명치좌’라는 이름의 영화관으로 문을 연 뒤, 1948년 ‘시공관’으로 명칭을 변경, 1957년부터 1973년까지 국립극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