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암각문들이 자랑스러운가

[사진] 계룡산 '갑사구곡'의 암각문들을 둘러보니

등록 2007.04.12 17:09수정 2007.04.1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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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윤덕영의 별장 '간성장'이었던 전통찻집.

윤덕영의 별장 '간성장'이었던 전통찻집. ⓒ 김유자


결코 자랑스러울 수 없는 계곡 이름

이땅엔 쌍곡구곡, 갈은구곡, 연화구곡, 선유구곡, 화양구곡 등등 구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참 많습니다. 중국 복건성 무이산 무이구곡에 무이정사를 짓고서 자연에 은둔했던 주자의 행적을 흠모했던 이땅의 선바들이 주자를 흉내내어 웬만한 경승지마다 구곡이라 이름지었던 탓이지요.


계룡산 갑사 옆을 흐르는 계곡에도 구곡이라고 부르는 계곡이 있습니다. '갑사구곡'은 순종황제의 두번째 정비인 정효황후 윤씨의 숙부인 윤덕영이 갑사 계곡에다 간성장이란 별장을 짓고 별장 앞을 흐르는 계곡을 구곡이라 부르며 명소마다에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집니다.

윤덕영이 어떤 사람인지요?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어전회의의 진행을 병풍 뒤에 숨어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던 순정효황후를 위협해서 옥새를 강탈한 뒤 순종에게 합방늑약에 옥새를 찍으라고 강요했던 문제의 인물 아닌지요.

그러니 그가 '갑사구곡'이라 이름붙인 계곡의 바위들은 '구곡'이란 사대적인 이름과 친일파의 손에 의해 새겨졌다는 이중의 치욕을 겪고 있는 셈이라고나 할까요. 9곡이라는 수정봉에서부터 1곡이라는 용유소까지 계곡을 더듬어 내려오면 윤덕영의 별장인 '간성장'이란 이름을 새긴 바위만 하더라도 얼핏 세어보니 너댓 군데가 넘더라구요.

4월 7일 (토요일), 갑사를 찾은 김에 시간을 내어 갑사구곡' 중 5곡인 군자대와 6곡인 명월담 근처의 암각문을 찾아 보았습니다.

a ' 6곡 명월담' 암각.

' 6곡 명월담' 암각. ⓒ 김유자


a '용화' 암각.

'용화' 암각. ⓒ 김유자


a '순화임원' 암각

'순화임원' 암각 ⓒ 김유자


석조약사여래 옆에 있는 명월담은 굽이굽이 몇 단의 폭포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이 고여 물속이 상당히 깊고 물빛이 파랗습니다. 만월의 달빛이 부서져내리는 밤에 와서 본다면 정말 환상적일 듯 합니다.


'6곡 명월담" 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순화원림'이란 암각문이 새겨진 바위가 외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원림(園林)은 자연 그대로에다 정자 하나를 짓는 정도의 별서정원을 이르는 말이지요.

옛 문헌들은 무궁화를 일러 ‘조균, 목근, 혹은 일급(日及)' 이라고도 불렀는데 특히 시인들은 순화(舜華)라고 불렀답니다. 그러니까 '순화원림'이란 '아름다운 무궁화 동산 '정도로 바꿀 수 있겠네요.


'용화'란 미륵보살이 부처가 될 때 용화수 아래 앉아 있었는데 그 꽃가지가 마치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화라는 이름이 붙였다는데서 연유한 말입니다. 미륵신앙에서 갈라져 나온 말인 셈이지요.

다 아시겠지만 미륵보살은 현재 도솔천 내원에 머물고 있으나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면 이 세상에 내려와 화림원 가운데 있는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법회를 열어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입니다.

a '간도광명' 암각.

'간도광명' 암각. ⓒ 김유자


a '간성장' 암각.

'간성장' 암각. ⓒ 김유자


a '천장소회어상 인문화성우하' 암각.

'천장소회어상 인문화성우하' 암각. ⓒ 김유자


a '금계암' 암각.

'금계암' 암각. ⓒ 김유자


'간도광명'이란 '간괘의 도가 빛나고 밝아지게 된다.'는 뜻이지요. 간은 팔괘로 보면 동북방에 위치해 있는데 동북방(우리나라)에서 세상의 도가 다시금 밝아진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윤덕영의 별장 이름인 '간성장 '은 간괘에 해당되는 지역이 장성해진다는 뜻입니다. 간괘는 동북방에 해당하며 봄이 찾아오는 길목이자 땅 속에서 움을 틔우려는 씨앗이며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머무는 태양의 뿌리가 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번성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天章昭回於上 (천장소회어상) 人文化成于下 (인문화성우하)' 은 풀이하자면 하늘에 올리는 글을 짓는 것은 군왕의 일이요, 인륜이 덕화를 이루는 것은 백성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금계암'이란 암각은 계룡산이 풍수학에서 말하는 '금계포란'과 '회룡고조'의 명당임을 확인하듯이 새긴 명문인 듯 싶습니다. '회룡고조'란 풍수지리에서 산의 지맥이 삥 돌아서 본산과 서로 마주하는 것을 말하고 금계포란이란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다산과 다복을 상징합니다.

공우탑을 보고 다리 아래로 내려서 계곡을 따라 몇 걸음 옮기면 5곡이라는 군자대에 닿는다. 갑사구곡 중 최고의 경승지로 꼽히는 곳이랍니다.

a '삼갑동주' 암각

'삼갑동주' 암각 ⓒ 김유자


a '삼갑동주' 암각 옆 '일중석' 암각.

'삼갑동주' 암각 옆 '일중석' 암각. ⓒ 김유자


큰 바위에 '삼갑동주'란 새긴 명문이 보이지요? 윤덕영이 자신을 '삼갑동주'라 자처하고 으스대는 게 상상이 됩니다. '삼갑' 이란 삼한(三韓)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중석'이란 하나의 중심이 되는 곳이란 의미입니다. 암각 끝에 간옹명(艮翁銘 )이라고 글을 쓴 사람이 나오는데 간옹이 누구인지는 확실치는 않습니다. 이곳에 전해지는 말로는 윤덕영의 호라고 합니다만.

갑사 계곡 암각이 가진 명암

그는 천문 지리 주역에 능통했다고 합니다. 친일의 댓가로 자작이 된 그는 이 글자들을 암각하려고 중국에서까지 각수(刻手)를 데려와 새겼다고 하는 말도 전해지는데 확인된 사실은 아니랍니다.

이곳 뿐 아니라 '갑사구곡'의 수많은 암각들은 주역을 중심으로 불교와 도교의 삼교가 결합하고 천지인이 일체를 이룬 이곳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 씨앗이 되는데 언젠가는 그 씨앗이 터져 뿌리를 뻗어 우리나라의 국운이 크게 뻗쳐나가리라는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하필이면 친일파 윤덕영에 의해 새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요? 그는 이 암각들을 통해서 자신의 친일을 변명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만족에 겨워 이 계곡이 마치 자신의 사유지라도 되는 듯이 멋대로 꾸며보고자 했던 것일까요?

그것을 누가 알 수 있겠는지요? 혹 저 바위들에게 입이 있어 귀띔이라도 해준다면 모를까. 바위도 말이 없고 지난 역사도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해석하는 자의 몫이다'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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