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처와 같은 호텔에 묵는다고?

자녀 졸업식에 함께 참석하고 같은 호텔에 묵는 이혼부부

등록 2007.04.26 10:58수정 2007.04.2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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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처럼 알고 지내는 미국인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그냥 일상적인 안부 메일이었는데 메일을 읽다보니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이혼부부의 상식적인(?) 관계와는 좀 동떨어진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번 주에 전처와 함께 차를 사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보험과 명의 변경에 문제가 생겼다. 왜냐하면 딸이 이곳 버지니아가 아니라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내가 경험한 이혼부부들은 서로에 대해 상종 못할 원수지간이었다. 아니면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지라 미국인 친구의 이메일을 보는 순간 문득 천박한 질문들이 내 안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아주 오래 전에 이혼했다면서 전처를 다시 만나는 거야? 차 산다는 핑계로 쇼핑도 같이 하고? 그럼 현재 부인은? 부인도 자기 남편이 전처를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이미 오래 전에 남이 된 전처를 다시 만난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자동차를 사러 가는데 전처와 함께 간다는 사실 역시 놀랍기만 했다.

'다음에 혹시 만나게 되면 한 번 물어볼까? 아니지, 그 사람의 사생활인데 묻는 건 실례가 되겠지.'


결국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주말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그가 다시 전처와 함께 자동차를 사러 간다는 얘기를 꺼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주방에서 바비큐 고기를 자르고 있는 친구 남편, 커트 시크. 이혼한 남자도 한때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주방에 들어간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주방에서 바비큐 고기를 자르고 있는 친구 남편, 커트 시크. 이혼한 남자도 한때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주방에 들어간 적이 있을 것이다.한나영
"으응, 저 말이야. 네 프라이버시에 관한 거라 묻기가 좀 그런데."
"뭔데? 괜찮아. 물어봐."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했지?"
"20년도 넘었어."

"그런데 아직도 전처를 만나?"
"아니, 만나는 건 아니야. 성격이 안 맞아서 많이 다퉜고 그게 싫어서 헤어졌는데 뭘 다시 만나겠어. 이번에 만나는 건 막내딸에게 자동차를 사주기로 했기 때문이야."

"자동차를 사주는 데 왜 만나?"
"차 값을 반반씩 내기로 했으니까. 고를 때도 같이 가서 봐야지. 둘 다 마음에 들어야 하니까."

"뭐라고?"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그가 설명하는 전 부인과의 재회는 이랬다.

8년 동안 결혼생활을 한 그에게는 이미 출가한 자녀들과 아직 대학생인 막내딸이 있다. 전 부인과는 성격 차이로 몇 년간 별거를 했고 결국 이혼을 했다. 그는 혼자서 십여 년 이상 살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 재혼을 했다. 전처 역시 다른 남자와 재혼을 했고.

아이들에 대한 양육비는 부부가 반반씩 부담하고 있다. 부부 모두 전문직에 있는 만큼 돈 문제는 이들 부부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녀문제에 대해 할 말이 있으면 주로 이메일이나 전화를 이용한다. 이번처럼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왜 만나느냐? 바로 5월에 대학을 졸업하는 막내딸 졸업선물 때문이다. 부인이 먼저 졸업선물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지금 딸아이가 타고 다니는 차가 너무 오래 되었으니 우리가 졸업선물로 차를 사 주는 게 어떻겠느냐."

그도 동의를 했다. 그래서 이들 옛 부부는 딸아이에게 줄 '서프라이즈 졸업선물'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와, 부자네. 자동차도 선물로 사주고."

"응, 부자는 아니지만 우리 딸은 자동차를 선물로 받을 만 해. 왜냐하면 4년 내내 전액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전처와 나는 대학 등록금을 내준 셈 치고 딸에게 자동차를 사주기로 한 거야. 새 건 아니고 2년 된 중고차로."

비록 부부의 연을 끊고 헤어지긴 했지만 자녀를 위한 일에는 따뜻한 부성과 모성을 함께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은 딸 졸업식을 위해 사우스캐롤라이나에 가게 될 이들 옛 부부가 같은 호텔에 묵게 된다는 것이다.

"에엥, 뭐라고? 전처와 같은 호텔에 묵는다고? 지금 살고 있는 부인도 졸업식에 간다면서."
"응, 오하이오에 사는 아이들도 졸업식에 참석하는데 그 애들도 엄마를 봐야 하니까 같은 호텔에 묵기로 한 거지. 애들이 호텔 예약을 그렇게 했더라고. 나도 괜찮아."

"가, 가만. 정리 좀 해 보자. 그러니까 너는 전처와 현처를 모두 거느리고 호텔에 묵는다는 거지?"
"응. 하지만 나는 아내와 같은 방을 쓰고 전처는 다른 방을 쓰는 거지."

"네 아내는 전처랑 같은 호텔에 묵는 것에 대해 뭐라고 그래?"
"뭘 뭐라고 그래? 이제는 서로 무덤덤해져서 둘 다 별다른 느낌 없는 거, 그 사람도 다 알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사랑의 반대는 미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더니 이들 옛 부부의 사는 모습을 보자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상대에게 별 느낌 없이, 그저 업무상 만나는 사람마냥 건조하게 서로를 대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도 이혼한 부부가 서로 으르렁대면서 원수처럼 사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만나고 이야기라도 할 수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하긴 이혼율이 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전과는 달리 산뜻하게 헤어지고 헤어진 뒤에는 친구처럼 지내는 이혼부부가 많다고 하지 않던가.

만약 이혼부부에게 자녀가 있다면 책임 있는 부모로서 자녀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다면 건강한 이혼부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결혼할 당시의 뜨거운 사랑이나 열정은 식었다 하더라도 한때 나를 가장 잘 알았던 그 남자, 혹은 그 여자와 그냥 친구처럼 '쿨하게' 만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화학식(?)이 복잡한 남녀관계상 그래도 정말 괜찮은 건지, 아는 분 있나요?

봄꽃이 핀 대지 위에 느닷없이 흰눈이 내려도 여전히 아름답듯이 헤어진 이혼부부도 여전히 아름답게 지낼 수는 없을까.
봄꽃이 핀 대지 위에 느닷없이 흰눈이 내려도 여전히 아름답듯이 헤어진 이혼부부도 여전히 아름답게 지낼 수는 없을까.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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