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푸징의 서점 아가씨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

'ㅏ'와 '아'가 같은 말인가요?

등록 2007.04.18 11:48수정 2007.04.1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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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북경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빙탕후루(冰糖葫芦)가 보인다. 빙탕후루는 작은 과일을 그대로 꼬치에 꿰어 설탕시럽을 입힌 먹거리로, 중국의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듯.

북경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빙탕후루(冰糖葫芦)가 보인다. 빙탕후루는 작은 과일을 그대로 꼬치에 꿰어 설탕시럽을 입힌 먹거리로, 중국의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듯. ⓒ 김동욱

왕푸징(王府井 왕부정)은 티엔안먼(天安门 천안문)에서 동쪽으로 2~3km 떨어진 곳으로 중국 쇼핑의 중심지다. '왕가의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왕푸징. 옛날 이곳에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물론 지금 왕푸징 거리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왕푸징 거리는 북경에서 가장 큰 호텔 중 하나인 베이징판디엔(北京饭店 북경반점, 판디엔은 중국에서 호텔을 의미)부터 시작된다. 베이징판디엔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왕푸징 답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맨 처음 오른쪽에 보이는 큰 건물인 신똥팡꽝창(新東方广场 신동방광장) 앞부터는 더 이상 차가 진입할 수 없다. 여기서부터는 차 없는 거리로 조성돼 있다.


3월 31일 여행 이틀째. 오전 시간을 거의 다 허비했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번 여행은 한꺼번에 많은 곳을 지나치듯 보거나 한 두 곳을 집중적으로 즐기는 선택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 손에 왕푸징 거리 지도가 있는 가이드북을 들고 왕푸징 입구를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오른쪽에 중국 최대 서점인 왕푸징 서점이 있다는데…' 우선 이 서점부터 찾고 싶었다. 그런데 눈에 안 띈 건지 내가 흘려 본 건지, 일단 나는 '중국 최대의 서점'을 찾지 못하고 지나쳤다.

외국인 서점 '와이원수디엔'에서 있었던 일

a 중국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왕푸징 거리. 천안문과 불과 2~3km 거리에 있어 연계해서 관광할 수 있다. 토요일 오전 왕푸징거리에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쇼핑을 즐기고 있다.

중국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왕푸징 거리. 천안문과 불과 2~3km 거리에 있어 연계해서 관광할 수 있다. 토요일 오전 왕푸징거리에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쇼핑을 즐기고 있다. ⓒ 김동욱

토요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왕푸징을 찾아왔다. '서울의 명동거리, 혹은 종로거리가 바로 여기라더니…' 다정해 보이는 연인들이 많이 눈에 띄고, 애를 데리고 모처럼 나들이 나온 가족들의 모습도 여기저기 보인다. 좀 더 걸어 들어가자 왼쪽에 다른 서점이 하나 눈에 띈다. 와이원수디엔(外文书店 외원서점). 가이드북에 따르면 4층짜리(5층인가?) 와이원수디엔은 외국인들을 위한 서점이다. 1958년에 문을 열었다고 돼 있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1층에는 영어, 불어, 스페인어 등 여러 나라 서적이 잔뜩 진열돼 있다. 실제로 이 서점을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외국인들로, 이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돼 있는 중국관광 가이드북과 사진첩 등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선물용 책갈피 몇 개를 골랐고, 8원 짜리(960원 정도) 북경 관광지도도 한 장 샀다. 이 북경 관광지도는 영어와 중국어, 그리고 병음 표기가 다 되어 있어서 나의 나머지 북경 여행 일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손바닥만한 크기의 38원짜리 중국어 회화 책(4600원 정도)도 한 권 샀다. 한글로 또렷이 '중국어 회화'라는 제목이 적힌 이 책의 판권에는 '상해 해원 음상출판사'에서 2006년 8월에 발간한 것이라고 적혀있다. 이 책은 중국 여행자들을 위해 제작된 듯한데, 실제로 비행기에서나 입국, 교통, 호텔, 식당 등에서 쓰이는 중국어를 요점만 뽑아 실용회화 중심으로 엮어 놨다.


a 왕푸징 거리에 있는 외국인을 위한 서점인 와이원수디엔(外文书店). 새계 각국의 책들이 진열돼 있어 외국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1층에는 한국인을 위한 중국어 실용회화책도 있다.

왕푸징 거리에 있는 외국인을 위한 서점인 와이원수디엔(外文书店). 새계 각국의 책들이 진열돼 있어 외국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1층에는 한국인을 위한 중국어 실용회화책도 있다. ⓒ 김동욱

2층, 3층, 4층…,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각 층마다 어떤 책들이 있는지 살폈다. 우리나라 서점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책만 진열되어 있지 않고 CD나 DVD 같은 광저장매체도 있다. 몇 층이었던가? 2층인지 3층인지, 층수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어학 책을 모아둔 층인 것으로 기억된다. 거기 올라갔을 때 마침 점원 아가씨 한 사람이 TV 모니터를 보고 무언가를 따라 말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 어~, 오~…."
'가만, 저거… 저거, 우리말이잖아. 한국어 공부하나 보네.'
신기했다. 모니터에는 강사로 보이는 두 명의 남녀가 한국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이 점원 아가씨는 모니터 강사가 시키는 대로 그 발음을 따라 하고 있었다. 내가 옆에 다가가자 이 아가씨 흠칫 놀라다가 이내 살짝 웃는다. 선머슴 같은 얼굴이 참 착해 보인다.

"워 스~ㄹ 한구어런(我是韩国人)."
"아!(啊)"
"수에시한구어위마?(学习韩国语吗? 한국어 공부하세요?)"
"스스~ㄹ(是是 예)."

중국 아가씨에게 한 한국어 명강?

여기서 더 대화가 이어지면 곤란하다. 한 마디로 밑천이 달린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돌아서야 한다. 그런데, 아차! 타이밍을 놓쳤다. 이 아가씨가 바로 질문을 날린다. 모니터를 가리키면서 뭔가를 묻는다. 한국말에 대한 질문 같다.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의 왼손바닥에 무얼 쓰면서 나를 보고 또 뭐라고 말한다. 나는 답답해진다. 얼른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칭씨에(请写써 보세요)."

그랬더니 이 아가씨, 우리글 모음 'ㅏ'를 쓰고 다시 그 옆에 '아' 자를 쓴다. 그러면서 나한테 다시 묻는다. 대충 이쯤 되니 이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아가씨는 지금 'ㅏ'와 '아'가 모두 '아'로 발음되는 지(혹은 같은 뜻인지)를 묻는 거였다.

난감해졌다. 질문의 요지는 알겠으나 대답이 힘들었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중국어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나는 이 아가씨 질문에 속 시원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띄엄띄엄 필담을 섞어서 이 아가씨에게 해준 나의 한국어 강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

"중국 한자와 달리 우리글은 소리를 적는 표음문자다. 자음과 모음이 있고, 이 자음과 모음은 그 각각으로는 절대 글자(음절)가 되지 않는다. 자음+모음, 혹은 자음+모음+자음의 형태가 한 음절을 이루는 최소 요소다. 아가씨가 말한 'ㅏ'는 모음이고, 'ㅇ'은 자음이다. 따라서 모음이 비록 음가(소리 값)가 있다하더라도 'ㅏ' 하나만으로는 글자가 될 수 없으니 그 앞에 자음 'ㅇ'이 붙여야 비로소 '아'라는 하나의 음절이 완성된다."

이 아가씨, 나의 명강을 이해했는지 아니면, 속으로 '이 자식 뭔 소리여~?'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짜이찌엔(再见=안녕~) 했을 때, 이 아가씨는 "씨에씨에 짜이찌엔(谢谢,再见)"했다. 대충 알아들은 모양이다. 오히려 내가 고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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