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숙 여명학교 교감.뉴스앤조이 주재일
- 보통 사람들보다 앞질러 시대를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난 삼수해서 91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새내기 시절 문익환 목사님이 학교에서 우리가 졸업할 때쯤이면 통일이 올 것이라고 하셨다. 그때는 '많이 편찮으신가 보다'고 웅얼거렸다. 그런데 정말이지 94년쯤 되니 거대한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새터민만 봐라. 2000년엔 500명이 왔다. 이해에 한국에 온 새터민은 그전에 들어온 '귀순용사'보다 훨씬 많았다. 해마다 증가해 2002년부터는 매년 1000명이 넘었고, 작년에는 2000명을 돌파했다. 벌써 남한에 온 새터민만 1만 명이다. 사람이 오고, 또 우리가 개성과 평양, 금강산으로 가면서 통일은 벌써 시작된 것이다."
- 남한은 통일을 이야기할 때 동상이몽을 꾸듯 서로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보수는 북한 인권, 진보는 한반도 평화를 논하는 식이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북한 인권과 한반도 평화 중 하나를 포기할 수 없는 문제다.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게 정답이지만, 어떤 뛰어난 정치가가 나와도 풀기 힘든 숙제다.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풀어주지 않으면 답이 없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소망하고 준비해야 한다. 새터민을 보듬는 것도 중요한 준비다.
중국동포 문제로 씨름하다가 새터민과 함께한 지 10년이 지났다. 많이 모자라도 한 자리를 10년간 지키니 전문가라는 소리 듣더라. 탈북자를 만나고, 새터민 야학 만들고,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열고. 모두가 처음이었다. 실수도 많았지만 깨달음도 컸다. 이제는 5년만 일하면 이 분야의 전문가 될 수 있다. 웰빙 생각해서 나서지 않아서 문제지. 늘 사람이 아쉽다. 기독청년들이 소명을 갖고 나서준다면 좋겠다."
- 새터민 문제는 말한 대로 몇 사람이 인생을 걸고 싸우는 것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과제다. 회의나 절망도 많았겠다.
"새터민과 뒤엉켜 살다 보니 많이 동화되었다. 남한에 온 이들은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긴 이들이다. 북으로 끌려가는 사람도 많이 보았고, 중국에서 정처없이 떠도는 이들도 만났다. 우리 정부는 이들은 넉넉하게 받아주지도 않으니 난감했다.
그들과 마주치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했다. '넌 왜 북에서 태어나 이런 고생을 하고, 난 여기서 이렇게 사는가'. 그럴 때마다 부채의식을 느낀다. 하나님 백성의 신음을 우리 기독교가 외면한다면, 돌들이라도 일어나 외칠 것이라고 믿는다."
- 이제 겨우 1만 명의 새터민이 들어왔는데, 정부는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다.
"통일이 정치적 선언으로 문을 여는 건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오가는 것으로 통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기쁘게 맞이해야지 오겠다는 사람도 외면하는가. 새터민이 50만 명 정도는 남한에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새터민 몇만, 몇십만 명과 함께 살지 못하면서 어떻게 통일을 하겠다는 건가. 새터민은 우리에게 통일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 새터민을 어렵게 하는 건 미온적인 정부만은 아닐 것 같다.
"탈북 아이들과 살다 보면 가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한참 자랄 성장기에 못 먹어 스무 살인데도 키가 140cm 정도거나 얼굴이 많이 늙어보이는 친구들이 있다. 한 친구가 한참을 운 뒤 자신의 키가 작아 학교에 가면 뭐하느냐고 했다.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공부하고 노력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이들이 겪는 절망은 우리가 쉽게 말할 수 없다. 새터민을 만난 남한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북한 출신들이 갖고 있는 정체성이 핸디캡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통일을 위해 소중히 쓰이도록 협력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눈치 보고 살게 만든다"
- 지난해 북 핵 사태가 터졌을 때 새터민 친구들의 견해를 묻는 기자들의 전화로 북새통을 이뤘다고 들었다. 최근에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급진전되고 있는데,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새터민 공동체도 많은 변화를 겪을 것 같다.
"아이들이 가끔 묻는다. 남과 북이 운동 경기를 하면 어디 쪽을 응원해야 하느냐고. 너는 어디 응원할 거냐고 물어보면, 조심스럽게 북한 응원해도 되느냐고 말한다. '너희들이 정치 때문에 북에서 나왔냐'고 원하는 대로 응원하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그래도 내 눈치를 살핀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눈치 보고 살게 만든다. 어릴 때 나온 아이들에게 정치적인 판단을 물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인터뷰하는 내내 조 교감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하루에도 100통 이상의 전화를 받고 또 그만큼 건다고 했다. 마침 여명학교에 쌀을 후원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 가르치는 일보다 돈 모으는 일로 더 분주한 것 같다.
"여명학교는 그래도 운영이 나은 편인데, 저녁에 탈북인 야학으로 운영되는 자유터는 늘 넉넉지 않다. 자유터에서는 사례비를 받지 않고 일한다. 여명은 신앙인을 위한 학교지만, 자유터는 신앙색을 띠지 않기에 후원을 받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그리고 내가 '주세요'라는 말을 잘 못한다. 내가 기금 모금을 못 해서일까. 우리는 언제나 겨우겨우 살아간다. 오늘도 쌀이 떨어져 보리밥을 먹었는데, 마침 도움을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늘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수밖에 없고, 또 은총 가운데 살고 있다."
- 성격이 다른 두 학교를 운영하는 게 어렵지 않은가.
"처음에 자유터를 찾는 아이들이 종교적으로 하는 거냐고 물어봤다. 밥 먹을 때 감사하다고 기도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포섭하는 건 아니네' 하고 안심한다. 순진한 녀석들이다.
남편이 사례비 없는 난민 사역을 하기 때문에 넉넉한 살림살이가 아니다. 아이들도 부모님이 보고 있다. 바쁘게 살다 보니 밥도 못하는 아내, 어머니가 되었다. 가족들이 넉넉하게 이해해줘서 늘 고맙고 미안하다. 대신 아프면 곤란하다. 탈북 청소년들 사이에서 나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다. 부모가 엄청나게 돈이 많다든지, 어디에서 많은 돈을 후원 받는다든지, 수단이 무척 좋은 사람이라든지 하는 이야기가 떠돈다.
자기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유형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북에서 당과 다수를 위해서 희생하기를 배웠지만 나약한 소수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것은 잘 모른다. 대신 대림동 지하창고에서 여명학교와 자유터의 문을 열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들을 대변하는 모습에 나를 신뢰하는 것 같다."
"여명학교와 자유터의 실험은 통일을 미리 준비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