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는 민족이 현대사에서 처한 고난의 역사를 자신의 인생사에 녹여 설명했다. 아울러 이 목사는 한국교회가 낮은 자들이 처한 고난의 현장과 삶, 사건에서 너무 멀어졌다고 지적했다.뉴스앤조이 주재일
이해학 목사(주민교회)의 인생사는 한국의 현대사와 얼기설기 엉켜있다. 해방둥이로 태어난 그는 지리산 자락 순창에서 자란 덕에 빨치산과 경찰이 동네 남정네들을 번갈에 가며 죽이고 끌고 가는 꼴을 보고 자랐다. 지긋지긋한 난리는 끝났지만, 그동안 옥수수 밭에 숨어 지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공부 대신 머슴살이를 하라는 주변의 권유 아닌 권유에 시달리던 어린 이해학은 1960년 광주로 유학와 신문팔이를 시작했다. 그가 배달한, 당시 여당지였던 <경향신문>은 이곳저곳이 먹지로 발라져 인쇄되었다고 한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덕에 정부가 검열한 흔적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 것이다. 신문을 받아든 이들의 반응을 보면서 소년도 세상에 조금씩 눈을 떠갔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 보내고, 4·19 때 용공으로 몰릴 뻔
"무슨 일이 났나 싶어 참여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시위대 맨 앞에 있더군. 앞에서는 경찰이 총을 겨누고 있고, 뒤에서는 시위대가 밀고. '어~ 어~' 하는 사이에 경찰이 휘두른 총의 개머리판에 이마가 깨져 병원에 실려 갔지. 이마가 깨져 뼈가 네 조각이 났어.(이마를 가리키며) 지금도 이렇게 움푹 들어갔잖아. 내 별명이 달걀 이마에 세우는 사나이야."
병원에서 사경을 헤맸고, 깨어나서는 경찰들이 "북에 갔다 왔느냐", "어떤 대학생과 만나느냐"는 취조에 시달렸다. 병원에서 도망쳐 자취방에 숨어 치료를 받으면서 그는 결심했다. '나를 다시 살려준 분에게 내 영혼을 바쳐야겠다. 그래 내 몸에도 그분의 도운 흔적이 남았다.'
청년 이해학은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순복음신학교에 들어갔다. 성령 받기 위해 금식을 밥 먹듯 했고, 삼각산을 다람쥐처럼 올라 다녔다. 흔히 말하듯 삼각산 소나무도 여러 채 흔들어놓았다. 최자실 목사에게 안수를 받으려고 정말 열심히 쫓아다녔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뜨거운 청년이었다.
'뜨거운' 순복음 신앙에서 '자유로운' 기장 목사로
'순수 복음만을 갈망하던 청년'이 빨갱이 목사가 되어 감옥을 안방 드나들듯 한 것은 고3때부터 보았던 <사상계> 때문이다. 장준하, 함석헌 등 <사상계>의 쟁쟁한 필진들이 이야기하는 민족과 민주화, 역사신학에 대한 이야기는 순복음 신앙과 늘 부딪혔고, 이 충돌은 순수 청년의 가슴을 늘 곤고하게 만들었다.
총장을 하겠다는 외국인 선교사와 왜 한국인은 총장을 할 수 없냐는 한국 목회자들이 갑론을박하자, 이해학은 졸업을 12일 남기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서울시립도서관에 파묻혀 책을 읽었다. 그리고 김재준 교수의 책에서 새로운 하나님을 만났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은 나를 컨트롤하는 분이었다. 언제나 내 곁에 붙어 나를 강제하고 감시하는 신이었다. 김재준 교수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자유를 분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 자신의 창조 사역을 맡기셨고,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새로운 하나님을 만난 감격에 도서관에서 엉엉 울었다."
이해학은 한신대에 입학했다. 순복음신학교 기숙사 강당에서 새벽마다 한신대와 연세대를 하나님의 불칼로 쳐 없애달라고 기도한 그였다. 자유주의 신학이 순복음의 뿌리를 썩게 한다고 한탄하던 그가 자유주의 소굴로 들어갔다.
우연한 시위 참여가 도시 빈민 목회로 이어져
입학과 동시에 군에 다녀온 그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시위 전면에 나서기를 꺼렸다. 그렇지만 그는 한 번의 사건으로 주요 인물로 부각됐다. 유신을 지지하는 언론 화형식 때 성명서를 써줬는데, 읽을 사람이 안 나와 직접 낭독했다. 이것이 빌미가 돼 3학년 2학기 때 제적됐다. 1973년 교단 인준 과정을 졸업한 그는 수도권특수선교위원회 간사가 되어 지금 성남 지역으로 파송 받았다.
주민교회는 1973년 3월1일 성남시 수진동 허름한 '슬레이트 집'을 전세로 얻어 문을 열었다. 주민교회의 전신은 월요교회(목사 권호경)다. 이해학 목사가 담임하면서 주민교회로 바꿨다. 월요교회는 노동·빈민 운동가들이 매주 월요일에 모이는 교회다. 합법적으로 모이기 위한 보호막으로 교회라는 외피를 썼던 것이다. 이해학 목사가 겉모양만 교회인 월요교회를 신앙 공동체로 바꾸어갔다. 운동가와 빈민·노동자가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신앙생활을 훈련했다.
주민교회는 탄압을 받으면서도 유쾌한 축제를 즐겼다. 1973년 이 목사와 교인들은 '예수님이 우리 시대 오신다면 어디로?'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청년들이 김포공황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외채가 들어온 곳,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납치해 죽이려다 들통 나 김종필 씨가 굴욕 외교를 하러 드나든 곳, 일본 매매춘 관광객들이 들락거리는 곳이라는 게 이유였다.
성탄절 새벽, 주민교회 교인들은 김포공황 앞에서 성탄 예배를 드렸다. 준비해간 현수막을 펼침과 동시에 경찰에 연행돼, 중학교 2학년 여학생부터 나이든 교인까지 경찰의 문초에 시달렸다. 이후 주민교회의 성탄절은 캐럴이나 크리스마스트리 대신 이 목사가 수감된 서울, 안양, 원주 교도소 밖에서 치렀다. 이 목사는 편하게 예수를 믿는 길도 있는데 왜 이렇게 요란하게 살까 싶다고 했지만, 교인들은 늘 그를 지지했고 고난을 겸허히 받았다고 한다.
유쾌하게 민주화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