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인문을 먼저 장악하라

[태종 이방원 80] 개경에 부는 피 바람

등록 2007.04.25 08:45수정 2007.04.2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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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간의 사저에 잠입하여 동태를 염탐하고 돌아온 날치의 보고는 충격이었다. 방간의 사냥 길에 따라 나서는 몰이꾼들의 복장이 사냥 복이 아니라 갑옷을 착용하고 창검을 들었다는 것이다. 방원의 사저에 비상이 걸렸다.

"숙번의 얼굴은 왜 보이지 않은가?"


제일 먼저 달려 나와 있어야 할 이숙번이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좀 과음한 것 같습니다."

민무구가 변명으로 거들었다. 호탕한 사나이는 두주불사(斗酒不辭)라 했던가. 사실은 과음 정도가 아니었다. 이숙번과 대작한 민무구는 대취한 이숙번을 수레에 태워 보내고 새벽에 들어왔던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만취라니 정신이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방원은 숙번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방원의 이러한 애정으로 안산군사에서 임금의 지근거리에 있는 승지의 직에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 숙번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괘씸을 넘어 실망스러웠다.


선제공격이 최상의 방어다

긴급 호출을 받고 달려 나온 의안공(義安公) 이화, 완산군(完山君) 이천우 등 10인이 방원의 사저에 모여 구수회의를 가졌다. 선제공격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사냥 길에 사냥 복장이 아니라 완전무장한 전투복 차림은 전투태세라는 판단이었다. 방원에게 군사를 내어 대응할 것을 극력 청했다. 방원은 군사로 호위하고 공격에 나가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골육(骨肉)을 서로 해치는 것은 불의가 심한 것이다. 내가 무슨 얼굴로 선공하겠는가?"

방원의 의사는 완강했다. 혈육의 피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그대들의 뜻이 정 그렇다면 사람을 보내어 형의 진의를 파악한 연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방원은 형 방간의 집에 사람을 보냈다. 대의로 이르고 형제지간에 감정이 있으면 만나서 풀자고 청했다. 방원의 뜻을 전해들은 방간은 단호했다.

"내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어찌 다시 돌이킬 수 있겠는가?"

방간은 결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방간의 의사를 확인한 방원의 사저는 폭풍전야와도 같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방간의 흉험한 것이 극진하여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작은 절조를 지키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돌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화가 방간을 성토했다. 이천우와 민무구 등 모여 있는 사람들 모두가 결전에 임하자고 강력히 청했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방원이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화가 따라 들어가 방원을 끌어안고 외청으로 나왔다.

마지못한 방원이 종 소근을 불러 갑옷과 병장기를 꺼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고 침실로 또 다시 들어가 버렸다. 안방으로 들어온 방원을 붙잡고 부인 민씨가 어젯밤 꿈 이야기를 했다.

"세종대왕을 안아줄 길몽입니다"

"새벽녘 꿈에 내가 신교의 옛집에 있는데 밝은 태양이 공중에 떠있고 그 해 바퀴 가운데에 우리 막동(莫同-세종대왕의 어릴 때 휘)이가 앉아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도 이상하여 무녀(巫女) 가야지(加也之)를 불러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라고 물으니 '공(公)이 왕이 되어 항상 이 아기를 안아 줄 징조입니다' 하였습니다."

"국기를 흔드는 실없는 소리 그만하시오. 하찮은 무녀의 얘기를 믿는단 말이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시오."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결단입니다. 결단을 미루는 것은 화(禍)를 부릅니다. 소첩은 공께서 결단할 때 결단하고 행동할 때 행동하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부인 민씨가 방원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조용한 말씨에 강한 힘이 있었다. 방석을 척결하던 '무인변란'도 옳았고 지금 군사를 움직이는 것도 옳은 결단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부인 민씨는 망설이는 방원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속삭였다.

"존경스러운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세요."'

방원이 갑옷을 입고 외청에 나오자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 모습은 한 마디로 출정식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방원이 말에 오르며 예조전서 신극례를 불러 자신의 뜻을 임금에게 전하라고 당부했다.

"형제간의 충돌로 소란스러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놀라지 마시고 대궐문을 단단히 지켜 비상에 대비하도록 명하심이 마땅할 줄 아뢰옵니다."

방원의 전갈을 받은 정종은 아연실색했다. 또 형제간의 피바람이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있을 때 방간이 보낸 상장군(上將軍) 오용권이 입궁하여 방간의 뜻을 전했다.

"'정안공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내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합니다. 청하건대 주상은 놀라지 마십시오."

또 다시 형제간에 피바람이라니...

오용권을 돌려보낸 임금은 도승지(都承旨) 이문화를 즉시 방간에게 보냈다. 그러나 방간은 이미 군사를 출동시킨 후였다. 인친(姻親) 민원공, 기사(騎士) 이성기 등의 부추김을 받아 군사를 출동시킨 방간은 아들 맹종과 휘하 군사 수백 명에게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태상전(太上殿) 앞을 지나가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뢰었다.

"방원이 장차 신을 해치려 하니 신이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발하여 응변(應變)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망연자실했다.

"네가 방원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태조 이성계는 한탄했다. 방석과 방번의 죽음도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데 또 다시 형제가 서로의 가슴에 칼끝을 겨눈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운명이 조화를 부린다면 숙명이 원망스러웠다.

군사를 이끌고 동대문(崇仁門)으로 향하던 방간이 선죽교(善竹橋)에서 임금이 보낸 도승지 이문화와 마주쳤다.

"군사를 멈추시오. 교지를 받으시오."

교지가 있다는 말에 방간이 말(馬)에서 내렸다.

"네가 난언에 혹(惑)하여 동기를 해치고자 하니 미치고 패악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네가 군사를 버리고 단기(單騎)로 대궐에 들어오면 내가 장차 너의 생명을 보전하겠다."'

방간은 임금의 만류를 코웃음으로 일축했다. 말에 다시 오른 방간은 군사들을 가조가(可祚街)에 포진시켰다. 가조가는 수창궁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길목이다. 개경에서 시가전이 벌어지면 누가 먼저 남산과 동대문(숭인문)을 선점하고 가조가를 장악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전략요충이었다.

"긴급 상황이다, 빨리 나오라"

이무렵 방원은 이응으로 하여금 동대문을 닫게 했다. 방간의 군사가 외곽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한편, 익안공(益安公) 방의에게 노한을 보내 전후 사실을 알렸다. 익안공은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로 정종 임금의 아우다.

전선은 형성되고 있는데 숙번이 나타나지 않았다. 속이 타는 것은 방원이 아니라 민무구였다. 어젯밤 늦게까지 같이 술을 마신 죄로 변명을 해주었지만 여태껏 나타나지 않으니 죽을 맛이었다. 방원의 눈치를 살피던 민무구가 "긴급 상황이 발생했으니 빨리 나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이러한 상황변화를 알 길이 없는 숙번은 느긋한 마음으로 일어났다. 방원의 사냥 길에 따라나서기 위하여 행장을 갖추어 콧노래를 부르며 백금반가(白金反街)에 이르렀을 때 민무구가 보낸 사람을 만났다.

"빨리 병갑(兵甲)을 갖추고 오라."

민무구의 전갈을 받은 숙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제 밤 숙취가 확 깨는 기분이었다. 사냥 길에 완전무장이라니 분명 큰 변이 난 것은 틀림없는데 알 길이 없었다. 부랴부랴 방원의 사저로 달려갔다. 사람들로 웅성거려야 할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방원이 군사를 출동하여 나갔다는 민부인의 말을 전해들은 숙번은 동대문(숭인문) 쪽으로 말을 달렸다. 말채찍에 불이 붙을 지경이었다. 시반교(屎反橋)에서 방원일행을 따라잡은 숙번은 두말없이 방원의 말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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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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