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극의 길에 걸림돌을 제거하라

[태종 이방원 82] 개경에 이는 등극의 바람

등록 2007.04.28 08:13수정 2007.05.0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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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이 지휘하던 군사와 이저의 시위군들이 각(角)을 불며 추격하자 방간의 군사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가기에 바빴다. 서익과 마천목, 이유 등이 선봉이 되어 쫓으니 방간의 군사 세 사람이 창을 잡고 응전해왔다. 마천목이 두 사람을 베려하자 방원이 제지했다.

"저들은 죄가 없으니 죽이지 말라."


서익이 창을 꼬나 쥐고 방간을 쫓았다. 궁지에 몰린 방간이 북쪽으로 계속 달아났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방원이 소근을 불렀다.

"무지한 사람이 혹 형을 해칠까 두렵다. 네가 빨리 달려가서 해치지 말게 하라."

소근이 고신부, 이광득, 권희달 등과 더불어 말을 달려 쫓았다. 방간이 호위하는 군사도 없이 혼자서 말을 달려 묘련(妙蓮) 북동(北洞)으로 꺾어 들어갔다. 골목길로 들어간 것을 미처 보지 못한 소근이 계속 달리니 허허벌판 성균관(成均館)이 나왔다. 닭 쫓던 개 격이 된 소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간은 보이지 않았다. 방간을 놓친 것이다.

a 개성 성균관. 조명남은 북한 화가이다.

개성 성균관. 조명남은 북한 화가이다. ⓒ 조명남

소근이 부리나케 성균관에서 되짚어 나오며 탄현문(炭峴門)으로부터 오는 행인을 붙잡고 물었다.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답변뿐이었다. 우매한 군사들이 방간을 해칠까 염려되니 밀착 보호하라는 방원의 특명을 받았는데 걱정이었다. 호랑이 같은 방원의 성난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소근이 보국문(輔國門) 서쪽 고개에 올라 바라보니 방간이 묘련 북동에서 마전(麻前) 갈림길로 나와 보국동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방향을 잡은 소근이 먹이를 발견한 살쾡이처럼 뒤쫓기 시작했다. 방간이 보국 북점(北岾)을 지나 성균관 서동(西洞)으로 방향을 틀더니만 예전 적경원(積慶園) 터로 들어갔다.


적경원 뒷마당에 도착한 방간은 말에서 내려 갑옷을 벗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방간은 활과 화살을 집어 던지며 벌러덩 누워버렸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훌훌 단신 단기(單騎)였다. 이제는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벼락같이 뒤쫓아 온 것은 권희달이었다. 방간은 권희달에게 창백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공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권희달이 공손하게 말했다. 죽이지는 않겠구나 라고 직감한 방간은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갑옷을 벗어 고신부에게 주었다. 궁시(弓矢)는 권희달에게 주고 환도(環刀)는 이광득에게 주었다. 항복의 의미다. 소근을 빤히 쳐다보던 방간이 말했다.

"내가 더 가진 물건이 없기 때문에 너에게는 줄 것이 없구나. 내가 다행히 살아난다면 반드시 후하게 갚겠다."

소근이 편안한 웃음으로 답했다. 권희달이 방간을 부축하여 작은 유마(騮馬)에 태웠다. 군사들로 하여금 옹위하게 하여 성균관 밖 동봉(東峯)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방간이 울부짖으며 혼자 말처럼 권희달에게 말했다.

"내가 남의 말을 들어서 이 지경이 되었다."

이 때 정종 임금의 교서(敎書)를 가지고 정구(鄭矩)가 찾아왔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치열한 상황이라 임금의 교서를 미처 전달할 길이 없어 이제 도착한 것이다. 방간이 절하며 교서(敎書)를 받았다. 황망한 심정으로 교서를 읽어 내린 방간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주상의 지극한 은혜에 감사합니다. 신은 처음부터 불궤(不軌)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방원을 원망한 것뿐입니다. 지금 교서가 이와 같으니 주상께서 어찌 나를 속여 죽이겠습니까? 원하건대 목숨을 부지하도록 선처를 바랍니다."

방간이 칼을 버렸다는 소식을 접한 방원은 군사를 거두어 마전(麻前) 갈림길 냇가 언덕 위에 말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송악산이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말에서 내린 방원은 남산을 바라보며 목 놓아 울었다. 울음마저도 신령한 산 송악을 바라보고 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휘하의 군사들도 눈물을 훔쳤다.

방간이 칼을 거두고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한 태조 이성계는 탄식했다.

"왕관도 버리고 아들 꽁무니 따라와 이게 무슨 꼴인가? 자식들의 피투성이 싸움을 지켜보기 위하여 목숨 걸고 위화도에서 회군했단 말인가? 내 죄업이 크도다."

개경이 너희들 놀이터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 장군이 지휘하는 왕당군과 개경 시가지에서 전투를 벌였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 때는 그래도 쓰러져 가는 고려를 구하겠다는 청년장교의 신념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방간과 방원이 서로의 가슴에 칼을 겨누고 아무런 명분도 없이 싸운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었다. 평범한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던 개경인이 그 당시를 기록으로 남겼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우리가 봉이냐? 고려를 말아먹기 위하여 최영 장군과 한판 붙어 왕관을 도둑질 했으면 됐지 한양에 몰려간 무뢰배들이 왜 개경에 되돌아와 쌈박질이냐? 개경이 너희들 놀이터냐?"

정종 임금이 우승지(右承旨) 이숙을 방간에게 보냈다.

"네가 백주에 왕도에서 군사를 움직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골육지정으로 차마 주살(誅殺)을 가하지 않으니 너의 소원에 따라서 외방에 안치하겠다."

임금은 대호군(大護軍) 김중보와 순군천호(巡軍千戶) 한규에게 명하여 방간 부자를 압송하여 토산에 안치하도록 했다. 이어 방간을 따르던 자들에 대한 치죄가 이어졌다. 박포를 순군옥(巡軍獄)에 하옥하고 방간의 도진무(都鎭撫) 최용소와 조전 절제사 이옥, 장담, 박만 등 10여 명을 별군옥에 가두었다. 순군옥에 갇혀있던 박포를 끌어내어 국문이 시작되었다.

"회안군을 어떻게 현혹하였는지 사실대로 이실직고 하렸다."

"정안공은 군사가 강하고 백성이 따르며 상당후(上黨侯)의 아우로 사위를 삼았는데 회안공의 군사는 약하여 위태하기가 아침 이슬과 같으니 정안군을 먼저 쳐서 제거하라고 하였습니다."

박포가 말하는 상당후란 이저의 아우 이백강을 말하는 것으로 방원의 맏딸 정순공주와 혼인했다. 국문은 계속되었다. 박포에게 곤장을 치며 날조하여 선동한 이유를 물었다.

"내가 정안공을 따라 정사(定社)의 공을 세웠으나 얼마 되지 않아 나를 외방으로 내쳤으니 어찌 나의 장래를 보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를 버린 정안공을 떠나 회안공에게 공을 세우면 더불어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전 소윤(少尹) 민원공은 율에 의하여 참(斬)에 처하고 박포는 관직을 삭탈하여 청해로 귀양 보냈다. 박만, 이옥은 변방으로 유배 보내고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용소는 삭직하여 장(杖) 60대에 처했다.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침, 전 판사(判事) 환유, 전 전서(典書) 설숭은 각각 태(苔) 50대에 처하고 호군(護軍) 원윤은 장 60대에 처했다. 박인길, 곽범, 김보해는 각각 장 70대에 처하여 먼 지방에 부처하였다.

내관(內官) 강인부, 원윤, 이백온, 전 전서(典書) 임천년, 우군 장군(右軍將軍) 김간, 장군(將軍) 이난, 이거현, 황재, 전 전중 은중경, 강승평, 선략장군(宣略將軍) 이윤량은 외방에 부처했다. 도망간 오용권, 곽승우, 민공생, 민도생, 정승길, 정윤, 김월하, 김귀남, 민교, 이군필, 김국진은 체포 즉시 원방에 유배하도록 하였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장담은 양차(兩次)의 공신이므로 파직만 시키고 승지(承旨) 조경은 당여에 간여하지 않았으니 특별히 죄를 방면해 주었다. 뒤처리에서 특이한 것은 방간에게 가담했지만 처벌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있었다. 강유신, 장사미, 이군실, 정승길이다. 이들은 훗날 태종에게 중용되었다.

왕자의 난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고 처벌받았다. 전투에 참가한 군사들과 궁궐의 내시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이는 정종이 방간과 연합하여 방원의 대항마를 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방원은 방간에게 적극 가담한 자는 물론 방원이 등극의 길로 가는 길목에 걸림돌이 될 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싹을 자른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왕위에 오른 정종이 동생 방원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 역량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 개경 환도다. 하지만 이를 방원이 용납하지 않았다. 방간과 방원의 쟁투는 정종 정권의 최대 주주인 방원에게 한마디 상의 없이 개경 환도를 결행한 임금에 대한 무력시위였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방간과 방원의 싸움을 사서(史書)는 물론 교과서에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기록되어있다. 방원과 방간의 싸움은 '난'이라 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위기에 처한 국가를 건지겠다는 구국일념도 폭정을 일삼는 군주를 몰아내겠다는 명분도 없었다. 오로지 형제간의 갈등이 폭발한 것뿐이다. 영역 다툼하는 뒷골목 시정잡배들의 싸움질하고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난(亂)이라는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외국의 침략전쟁을 병자호란, 정묘호란, 임진왜란이라 부르는데 익숙해져있다. 이건 분명 전쟁이다. 이해가 상충하는 세력이 명분을 내걸고 피 튀기며 싸우거나 피 기득권층이 기득권층을 상대로 봉기하는 것을 난이라 한다면 전쟁은 국가의 총 동원 하에 살육과 방화와 약탈이 자행된다. 피 침략국은 방비 없이 당해야 했고 무고한 백성들은 희생과 학살이 뒤따랐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백성들의 피해가 없었던 방간과 방원의 쟁투는 그들만의 싸움이었다. 때문에 형제간의 싸움 내지는 정변에 불과했고 임진왜란은 한·중·일 3국간의 국제 전쟁이었다. 형제간의 싸움을 '난'이라 격상하는 것도 옳지 않거니와 국가와 국가 간에 치른 전쟁을 '난'이라 부르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발상이다.

전쟁을 '난'이라 절하 하고 몸을 사리는 것은 소국이 감히 대국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느냐 하는 사대주의와 근대 교육 이후에 황국사관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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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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