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나루터이정근
태조 이성계의 성미를 익히 알고 있는 방원은 사양했다. 부인 민씨가 몸종을 거느리고 신암사(神巖寺) 불사에 참석했다. 시주도 두둑이 했다. 부인 신덕왕후와 방번과 방석 그리고 사위 이제의 극락왕생을 비는 태조 이성계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불사에 몰입했다. 굵은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태조 이성계의 모습을 지켜보는 민씨는 가시방석이었다.
이때였다. 불사를 주관하던 주지스님이 몸을 비비 꼬며 죽어 버렸다. 어떻게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깊은 산속 산사는 소동이 벌어지고 불사는 중단되었다. 불미한 일을 겪은 태조 이성계는 불사를 거두고 돌아갔다. 이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정빈은 자신의 죄업만 같아 몸 둘 바를 몰랐다.
황당한 일을 목격한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을 직접 찾기로 마음먹었다. 개경인들의 눈이 부끄러워 칠흑 같이 어두운 사경(四更, 1시~3시)에 개경을 떠났다. 정종이 부랴부랴 서둘러 아버지를 지송(祗送)하고자 숭인문에 이르렀으나 태조 이성계 일행을 따라잡지 못하고 궁궐로 돌아갔다.
130여필의 마필이 동원된 태상왕 행차가 임진나루를 건너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렀다. 어둠이 걷히고 시야가 트였다. 자신의 행차에 방원이 따라붙은 것을 발견한 태조 이성계는 행차를 멈추라 명했다.
"네가 따라오면 신도에 가지 아니하고 행차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 갈 것이다. 냉큼 돌아가거라."
불호령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의 명에 방원이 개경으로 돌아가려 하자 대장군(大將軍) 박순이 붙잡았다.
"태상왕께서 비록 저하로 하여금 따라 오지 못하게 하였으나 여기까지 이르렀다 돌아가는 것은 신자(臣子)의 도리가 아닙니다. 태상왕께서 한양에서 오대산으로 거둥 하신다는데 만일 저하가 따라 행하면 태상왕께서 반드시 가시지 못하고 중지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산천을 발섭(跋涉)하여 멀리 오대산에 가실 것이니 뒤에 반드시 후회함이 있을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방원이 개경으로 돌아갔다. 한양에 도착한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에서 정근법석(精勤法席)을 베풀고 옷을 벗어 부처에게 시사(施捨)한 다음 오대산으로 떠나버렸다. 태상왕의 행적이 오리무중에 빠지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법왕도승통(法王都僧統) 설오(雪悟)를 한양에 보내 태상왕의 환가(還駕)를 청하였지만 설오가 오히려 설득당하여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 오대산으로 들어가 버리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져 버렸다.
"창업한 임금은 자손이 마땅히 받드는 법입니다. 나라 사람들이 태상왕 가시는 곳을 알지 못하니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가 아닙니다. 청하건대 수상(首相)과 두세 훈로(勳老)를 보내어 나라 사람의 정을 진솔하게 전달해서 거가를 돌이키도록 청하여 성체(聖體)를 보전하고 편안하게 하여 신민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태상왕의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비록 재상을 시켜 청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힘없는 임금을 마구 흔들어대는 실세들
정종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방원 때문에 상심한 아버지를 돌이킬 미력도 없었고 아우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부복하여 석고대죄 하라 설득할 힘도 없었다. 흘러가는 시냇물에 떠내려가는 한 잎 낙엽이었다.
임금이 힘을 잃고 흐느적댈수록 방원 세력의 압박은 거세어졌다. 좌우에 포진한 방원의 추종세력 때문에 숨 막힐 지경이었다. 견디지 못한 정종은 도승지(都承旨) 박석명을 불렀다.
"왕세자(王世子)에게 선위(禪位)하겠다."
도승지에게 교서를 지어 올리라 명했다. 폭탄 아닌 폭탄선언이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며칠 전부터 수창궁 후원에 밤마다 부엉이가 나타나 울고 여우가 울더니만 불측한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정종에게는 어쩌면 홀가분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어려서부터 말 달리고 활 잡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학문을 하지 않았는데 즉위한 이래로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앙과 변괴가 거듭 이르니 내가 비록 조심하고 두려워하나 어찌할 수 없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학문 배우기를 좋아하여 이치에 통달하고 크게 공덕이 있으니 마땅히 나를 대신하도록 하라."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이무는 교서(敎書)를 받들고 도승지(都承旨) 박석명은 국보(國寶)를 받들어 인수부(仁壽府)에 나아가 방원에게 바쳤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바친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