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를 만나러 시속 160km로 달리다

가정의 달 5월...보고 싶은 어머니

등록 2007.05.01 14:27수정 2007.05.02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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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160km. 마음이 초조하여 속도가 얼마나 올라갔는지 의식하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생사가 내 액셀러레이터에 달려있기나 하다는 듯이 앞만 보고 내달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정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 보지요?"
"왜 그러세요?"
"과속입니다. 무려 160km나 밟으셨어요."
"아! 예, 그래요? 그렇게 밟은 줄 몰랐습니다. 바쁘니까 빨리 스티커 끊으세요."
"네~에?"

"우리 어머니가 지금 살아계실지 돌아가셨는지 모릅니다. 운명하시기 전에 빨리 가야 합니다. 제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시기로 했는데. 바빠요. 빨리 끊으세요."
"아! 예, 그러시군요. 그냥가세요. 너무 빨리 달리지 말고 조심해서 가세요."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던져놓고 '대한민국 아직은 살만하구나!' 생각하며 다시 달리
기 시작했다.

전라도 남자를 선택하다

김옥자
1981년, 광주민주화항쟁이 끝나고 이듬해 나는 영호남 갈등이 무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적어도 그때까지는 내 주위의 사람들은 전라도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남편을 만나 반쪽은 전라도 사람이 되었다. 80여 차례의 선을 본 끝에 선택한 나의 반쪽이었다.


8남매의 맏며느리, 전라남도에 나이도 많아, 우리 집안에는 어느 것 하나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상태였으나, 할머니의 '광산 김씨면 의성 김가보다 양반이다'라는 한 마디에 힘을 얻어 나는 전라도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우리는 만난 지 99일 만에 혼배 미사를 했다.

영호남간의 갈등과 설움도 많았다. 별난 시동생들 때문에 마음을 끓이는 시집살이를 시작했으나, 동네에서 호랑이로 소문난 시어머니 덕에 살았다면 믿어질까?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지만 시어머니의 며느리 사랑은 독특하고 유달랐다. 신식며느리 들어온다고 지은 지 100년도 더 된 집의 내부를 수리했는데 방 한 칸은 안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 샤워 시설까지 달린 양변기를 들여놓은 최신식 신방을 만들어 주셨다. 일 년에 서너번 내려오는 며느리를 위해서.


명절이 되면 '몇 시에 도착하도록 오너라'하셔서 그 시간에 맞추어 가보면, 동네 아줌마들을 불러 모든 음식 준비를 이미 다 끝낸 후였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우리 며느리는 귀하게 자라서 일 못하지라우"라시며 명절날 오후에는 바리바리 싸서 주시며 "촌은 불편헝께 얼능 서울로 가라잉" 하시며 등을 미셨다.

16평짜리 아파트였지만 불편한줄 모르고 살았는데 둘째 아이를 낳은 후에는 집이 좁다고 큰 아파트로 넓혀 주셨다. 그리고는 애기들 잘 키워야 한다며 일하는 사람을 구하라는 등쌀에 못이기는 체하며 편한 세월을 살았다. 무엇이든 좋은 것만 있으면 주저 없이 싸들고 서울로 오셨다.

결혼 전에 나의 몸무게 45kg. 그런 나를 보신 어머니께서는 밥 한 그릇 맘 편히 얻어 먹겠느냐시며 해마다 며느리 생일 때면 보약을 지어 오시기를 무려 9년. 덕분에 내 몸은 세상 좁을세라 부풀어 올랐다. 너무 살이 쪄서 견디다 못한 내가 "어머니, 보약 그만 먹을래요" 했더니 그만 삐지셔서(?) 달래드리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어느 날은 무심코 애기들에게 오리알이 좋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6개월이나 서울에를 오시질 않아 웬일인가 했더니, 장날 장에 가셔서 새끼 오리를 사서 손수 키워서 오리알을 받아오셨다.

그런 어머니께서 위암 말기 선고를 받고 목숨이 바람 앞에 등불이 되어 계신다. 이제 겨우 나와 12년 사셨는데…. 친정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는 아들이 귀한 집에 태어나 선머스마로 동네 골목대장을 하며 '왈가닥'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자랐다.

아쉬운 것이 없어서 그랬는지 엄마가 안 계셔도 별로 느끼지도 못하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런 나에게 엄마가 생긴 것이다. 처음엔 '어머니'란 단어가 오히려 어색하고 별다른 감정도 느끼지 못했었는데, 시어머니의 '엄마 없이 자란 불쌍한 우리 애기'란 말씀에 오히려 발끈했었는데, 이젠 어머니의 지극한 관심과 사랑으로 이제야 어머니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시작했는데, 그 어머니가 돌아가시려고 한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김옥자
정신없이 달려 도착해 보니 어머니께서는 약속대로 살아 계셨다.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무슨 기력으로 버티셨을까? 이미 말씀을 할 수 없어 남은 힘을 다해 내 손을 꼭 잡으시는 어머니의 손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규식이를 잘 부탁한다."

당시 38세이던 시동생은 미국에서 10년 만에 귀국해 놀고 있을 때였다. 당신의 8남내 중 그 하나만 성례를 시키지 못하셨다. 나도 어미이기에, 그 마음을 알기에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규식이 때문에 눈 못 감으세요? 걱정마세요. 제가 제 큰아들로 생각하고 장가도 보내고 잘 돌볼게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셨을까? 내 손을 힘껏 잡으시더니 이내 스르르 놓으셨다. 나는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나무 비녀를 꽂아 드렸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또 있었던가! 엄동설한에 어머니를 시골 집 뒷산에 모셔 놓고 100일 상식을 올렸다.

나의 친정에서와 남들은 내 남편을 '군자 같다, 부처 같다' 심지어 '예수님 같다'고 한다. 나는 간이 커서 그런 남편에게 막 덤빌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머니를 생각하고 참는다. 며느리를 그렇게 귀애하실 때는 당신 아들이 며느리의 천배 만배는 더 귀했을 텐데, 어머니의 그렇게도 귀한 아들한테 내가 이러면 안 되지하는 생각이 들면 남편에게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든다. 며칠 전에도 다투었다. 남편한테 미안한 게 아니라 어머니께 죄송하다. 그리고 어머니가 보고 싶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월간 문학바탕에서 신인상을 받아 등단한 수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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