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도 자라고 사랑도 자라는 엄마의 밭

노부부의 사랑이 자라는 텃밭이야기

등록 2007.05.01 16:46수정 2007.05.02 09:1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상추를 솎아주시는 부모님
상추를 솎아주시는 부모님김혜원
"상추를 솎아줘야 할 것 같아. 상추가 아주 많아 자랐더구나."


새벽부터 밭에 올라가신 엄마가 아침식사 시간이 다 되어도 밭에서 내려오실 줄을 모르십니다. 시장하실 시간이 지났는데도 뭣 때문에 저리도 밭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계시는 걸까요?

"아버지 밭에 좀 올라가 보세요. 엄마 식사하시라고 하세요.”

기다리다 못해 아버지에게 엄마를 모셔 오시라 부탁을 했지만 엄마를 모시러간 아버지도 내려오시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살짝 화가 나려고 합니다.

이미 차려놓은 밥은 다 식고 국도 두 번이나 다시 데워 놓았는데도 엄마는커녕 모시러간 아버지도 내려오시지 않으니 화가 날 밖에요. 기다리다 지쳐 모자를 눌러 쓰고 밭으로 올라가 봅니다.

"아침 드셔야지요. 밥도 다 식고 국도 식고… 얼른 내려오세요."
"이거 조금만 더 솎아주고 내려가마. 배고프면 너 먼저 먹어. 난 이거 다 하고 아버지랑 함께 먹을 테니."
"그래, 나도 엄마랑 좀 더 있다가 내려가마. 너 먼저 먹어라."


일하러 가신 엄마는 물론 이젠 부르러 가신 아버지까지 오히려 귀찮다는 듯 저를 쫒아버릴 기세입니다. 식사를 하고 다시 일을 하셔도 될 텐데 배고픈 것까지 참아가면서 저렇게 밭에 매달리는 이유가 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얼른 내려오시라니까요. 밥상을 몇 시간씩 차려놓게 하시는 거예요. 빨리 내려 오시라구요. 식구 몇 된다고 아침을 몇 부로 나누어서 먹어. 내려오세요."
"아휴, 성화도 해쌌는다. 먼저 먹으라니까."


"햇빛보고 자란 채소가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지?"

청상추,적상추,쑥갓등 채소가 가득
청상추,적상추,쑥갓등 채소가 가득김혜원
딸의 잔소리와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따라 내려오시는 엄마와 아버지. 아침시간인데도 벌써 이마에는 땀이 흥건하시고 내려오시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식사도 하시지 않은 채 새벽 5시부터 시작한 농사일을 오전9시 무렵까지 계속하셨으니 지칠만도 하시지요.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는 솎아 낸 상추와 웃자라 맛이 떨어지지만 그냥 두면 아깝다는 두릅을 가지고 요리를 시작하십니다. 금방 따낸 향긋한 채소에 밥을 비벼 드시려는 모양입니다.

"신기하지 않니? 씨앗 그거 모두 해야 백원 어치도 안 되는 양인데 지금부터 장마까지는 매일 매일 솎아 먹고도 남을 정도로 자라 줄테니 말이야. 햇빛보고 자란 채소가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지? 키워서 먹어보면 사서 먹는 채소 못 먹는다. 이런 재미에 밭에 올라가면 시간가는 줄 모르는거야."

"제가 재미를 뭘 알아. 도와 달랄까봐서 슬슬 피하기만 하는데. 늙은 우리들이나 재미있지."

엄마는 백원 어치도 안 되는 씨앗에서 몇 개월 먹을 채소가 나는 것이 거저라고 했지만 그게 어디 거저겠습니까. 아무리 새벽잠이 없는 노인들이라지만 하늘이 부옇게 밝아지는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구부러지지도 않는 부실한 다리를 엉거주춤 구부린 채 잡초도 뽑고 김도 매고, 거름도 하고, 새 씨앗도 뿌려가며 쏟아낸 땀과 수고가 얼마인데 말이죠.

그래서 자식들은 엄마의 밭농사에 대해 가끔 잔소리를 합니다. 무릎수술 후유증으로 구부러지지 않는 다리에 당뇨병과 혈압까지, 건강만 챙겨도 모자라는데 밭일까지 하면 무리가 가실까 걱정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자식들의 잔소리에도 엄마의 밭사랑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당신이 몸을 움직여 뭔가를 이루어내고 그 소출로 남편과 자식, 이웃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으니 그보다 보람 있고 재미있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산에 올라가 흙을 밟고 맑은 공기를 마시니 오히려 건강이 더 좋아지는 것 같다고 하시니 건강상의 이유로 밭일을 말리는 자식들도 두손을 들고 말 지경이랍니다.

상추겉절이와 두릅이 있는 식탁
상추겉절이와 두릅이 있는 식탁김혜원
"여보, 우리 밥 비벼 먹읍시다. 상추하고 두릅하고 나물들 넣고 고추장에 비벼드릴게요."
"그거 좋오치~ 그게 바로 무공해 건강식이거든."

커다란 양푼에 방금 뜯어온 어린 상추와 두릅무침 고추장 한술을 넣고 맛깔난 솜씨로 밥을 비빈 엄마, 아버지에게 수저 하나를 들려 드립니다.

"이 그릇에서 같이 드세요. 그래야 더 맛있어. 많이 드세요."
"그럼, 거 맛나겠다. 당신도 많이 들어요."

식탁에 마주앉은 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먹어보란 소리 한마디 없이 주거니 받거니 밭 이야기, 채소 이야기를 나누며 양푼비빔밥을 나누어 드시는 두 분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납니다. 당신들이 재배한 채소가 자랑스러우신 듯 서로 많이 먹으라며 권하는 모습이 요즘 신혼부부의 깨소금 사랑은 저리가라겠지요.

아무래도 엄마의 밭에서는 채소만 자라는 것이 아니고 부부 사랑도 함께 자라는 모양입니다.

저녁에는 당신이 솎아온 야채를 가지고 자식들을 위해 맛난 푸성귀 겉절이를 해주신답니다. 오늘 저녁에는 나도 부모님들처럼 남편과 함께 양푼비빔밥에 숟가락 두 개를 꽂아서 먹어 볼까 싶네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4. 4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5. 5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