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김은 왜 하얀색 옷만 입을까?

[서평] 신항식 <색채와 문화 그리고 상상력>

등록 2007.05.03 11:57수정 2007.05.03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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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네시스

의사들이 입는 가운은 왜 하얀색일까? 고급 승용차는 왜 검은색일까? 한나라당의 상징 색은 왜 파란색일까? 앙드레김은 왜 항상 하얀색 옷만 입을까? 누구나 한번쯤 이런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엔 막연히 '어떤 이유가 있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알고 보니 거기엔 역사적·문화적·기호학적 기원이 있었다.


즉, 특정 대상(예를 들어 하늘, 땅, 나무 등)을 언어라는 기호(記號)로 표시하듯이 색채 또한 처음부터 있었거나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하얀색', '검은색', '파란색' 등의 기호로 표시하기로 약속한 결과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색채에 여러 가지 상징, 이미지, 의미작용이 덧씌워졌다는 얘기다.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하얀색을 하얀색으로, 검은색을 검은색으로, 파란색을 파란색으로 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지만 실재론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하얀색, 검은색, 파란색 등의 구분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실재론에 따르면 진실은 우리 머릿속에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실재로부터 얻어진다. 예컨대 우리 눈앞의 다양한 색채들 역시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시시각각 다르게 느껴지는 색깔들의 '진실'은 빛의 파장과 굴절 그리고 우리 눈의 물질적 구조가 서로 관계한 결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색채의 진실은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것 너머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본문 중에서)

일리 있는 얘기 아닌가? 근본적으로 무엇이 하얀색이고 검은색이고 파란색인지 따져 들어가면 그 실체가 모호해진다. 그와 같은 색채 구분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에 하얀색, 검은색, 파란색으로 보인다고 해서 곤충이나 파충류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푸른 바다', '하얀 구름', '검은 밤', '빨간 불' 등과 같은 표현을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하고 있고,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대원의 제복은 당연히 주홍색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소방대원은 반드시 주홍색 제복을 입어야만 하는 걸까?


이 책의 저자는 소방대원이 반드시 주홍색 제복을 입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주홍색 제복이 시각적으로 주목하기 쉽다는 속설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하긴 그 말에도 일리는 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주홍색 제복이 시각적으로 시선을 끌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소방대원의 제복은 주홍색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거기엔 기능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 의식 속에 '소방대원의 제복 = 주홍색', '불 = 빨간색', '바다 = 파란색', '밤 = 검은색' 등의 도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도식은 처음부터 있었거나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이루어진 '색채 관리'를 통해서 우리 의식 속에 자리 잡은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색채 관리'란 인류 역사에서 지배적인 권력이 색채에 의미를 부여하고 관리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불이 빨간색이 아니라거나 바다가 파란색이 아니라거나 소방대원의 제복이 주홍색이어선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실제로 불은 빨간색이고 바다가 파란색이라고 해도 그것이 '불 = 빨간색', '바다 = 파란색' 등의 도식이 되기까지는 오랜 기간에 걸친 '의식화 작업'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바다 = 파란색'이란 도식을 들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이 도식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고대 서구인들은 바다를 검은색 물감으로 그렸다고 한다. 그 주된 이유는 파란색 물감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당시 사람들은 '바다 = 파란색'이 아니라 '바다 = 검은색'이란 도식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색은 우리의 시각에 의하여 이미 '의미화'되어 있다. 색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온 것이라서 지각되기 이전에 정서와 느낌,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색은 애초부터 사람들이 모여 그 쓰임새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색은 우리 시각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며, 이런 의미에서 색은 문화이며 역사이다. (....) 색채는 언어보다 훨씬 덜 코드화된 기호다. '자식'이라는 언어 표현은 구어에서 친근한 상대를 부르는' 말이지만, 다른 문맥 속에서는 욕이 되거나 누군가의 아들을 지칭한다. 하물며 언어같이 '명료해' 보이는 기호도 이럴진대 색채는 오죽할 것인가."

이처럼 색채는 색채 자체로서만 존재한다기보다 그 색채에 더해진 의미, 상징, 이데올로기 등을 통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의사들이 하얀색 가운을 입고, 고급 승용차가 대부분 검은색이고, 한나라당의 상징 색이 파란색인 이유도 단순히 개인적 취향이나 선호도 때문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색채에 스며든 의미작용, 상징,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

신항식의 <색채와 문화 그리고 상상력>은 바로 그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가 잘 몰랐던 색채의 또 다른 모습, 즉 기호로서의 색채, 상징으로서의 색채, 이데올로기로서의 색채를 만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의사들의 가운, 병원, 약품, 성모 마리아 상(像) 등에서 볼 수 있는 하얀색의 상징적 의미가 무언지, 왜 검은색이 부르주아나 파시즘과 연결되는지, 한나라당의 상징색인 파란색이 어떻게 해서 보수성을 갖게 되었는지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참고로 앙드레김이 항상 하얀색 옷만 입는 이유는 일단 개인적 취향으로 봐야 하겠지만 또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책에 의하면 하얀색 옷을 즐겨 입는 디자이너가 앙드레김뿐만이 아니라고 한다. 의외로 앙드레김처럼 하얀색 옷을 즐겨 입는 디자이너들이 아시아 지역에 많다고 한다.

거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아시아 지역의 디자이너들이 하얀색 옷을 즐겨 입는 것은 검은색 옷을 선호하는 서구 디자이너들에 대한 차별화, 저항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럴 듯한 얘기다.

이처럼 색채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색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엔 문화, 역사, 정치, 경제, 사회, 상징, 의미작용, 상상력, 이데올로기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색채는 어린아이들의 그림책 속에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색채는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인 동시에 매일 매일의 경제 활동과도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색채에 대한 순진한 믿음에서 한 걸음 나아가 색채의 또 다른 모습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신항식, <색채와 문화 그리고 상상력>, 프로네시스, 2007, 195쪽. 가격 1만1000원

덧붙이는 글 신항식, <색채와 문화 그리고 상상력>, 프로네시스, 2007, 195쪽. 가격 1만1000원

색채와 문화 그리고 상상력 - 문화사 이야기

신항식 지음,
프로네시스(웅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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