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소
같은 글자로 시작하는 단어의 배열이나 나열은 그 나라 말을 사용하는 이의 풍성한 어휘력에 따라 끝없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 어떤 한 글자를 두고서 연상되는 단어들을 유추해내는 능력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어렸을 때 많이 하던 말 잇기 놀이도 그런 능력 테스트(?)이겠지요. 그런데 그 어휘력이 풍부하더라도 그 배열이나 나열을 한 편의 시로 묶어낼 수 있는 이는 정말 드물 것입니다.
라.......
라미 라미
맨드라미
라미 라미
쓰르라미
맨드라미 지고
귀뚜라미 우네
가을이라고
가을이 왔다고 우네
라미 라미
동그라미
동그란
보름달
- '귀뚜라미' 전문
'라'에서 시작한 시는 '맨드라미, 쓰르라미, 귀뚜라미, 동그라미'로 이어집니다. 이 책을 읽는 아이는 '라'에서 번져가는 단어의 종류를 알아가며 성장할 것입니다.
우리말은 가로로만 이어지는 영어나 불어의 알파벳과 달리 자음과 모음이 복수로, 그것도 위아래로 결합하여 낱자를 형성하면서 하나의 소리를 갖는 음절이 됩니다. 반대로 한 음절(글자)은 자음과 모음으로 분리되고 특별히 모음은 하나의 음절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장차 어떤 글자의 가능태가 됩니다.
예를 들어 'ㅏ'는 물론 '아'로 읽히지만 어떤 자음이 붙느냐에 따라 본음을 지닌 채 동반되는 자음의 소리를 따라 갑니다. '가', '나', '다'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책 <말놀이 동시집 1>은 정확히 'ㅏ, ㅓ, ㅗ, ㅜ, ㅡ,ㅣ'에서 출발합니다. 음운(자음이나 모음)이 음절이 되고, 음절이 단어가 되고, 단어와 단어가 문장이 되고 급기야 시가 되는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보통 유아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칠 때, 자음과 모음을 가르치기 전에 단어를 먼저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통문자 인식'이라고 하는데, 유아들은 단어의 모양새를 보고 그 음가를 기억합니다. 그래서 복잡한 형태의 단어들이 오히려 아이들 뇌리에 먼저 기억됩니다.
'가' 보다는 '빵'이라는 단어 같은 경우입니다. 그렇게 글자가 크게 쓰여진 단어 카드를 해당되는 그림과 같이 보여주면서 단어를 익히게 합니다. 물론 그 과정이 즐겁고 자연스러워야 습득이 용이할 것입니다. 이 책 본문 글자 전체가 고딕체로 되어 있는 것은 유아들이 인식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의미있는 단어보다는, 의미가 있든 없든 하나의 낱글자가 더 풍성한 상상력을 갖게 합니다. '구렁이'보다는 '구'가 더 많은 가능태를 내포합니다. 이것이 시인에게 시심(詩心)을 일으키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이 동시집이 보여줍니다.
최승호 시인은 그렇게 우리말의 유연한 연결성을, 표현력을 보여줍니다. 책 제목이 <말놀이 동시집>입니다. 우리말을 가지고 그것도 낱글자를 가지고 연상되는 고유명사, 의성어, 의태어를 찾아냅니다. 말의 즐거운 유희입니다. 최승호 시인은 그렇게 '시의 밭'을 새로이 개간했습니다.
파......
파
파란 파
파를 파네
파를 묶어서 파네
할머니 파 한 단에 얼마예요?
- '파' 중에서
아마도 이건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정감의 상상력일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상상력은 아마도 어른보다 더할 것입니다. 말로, 글자로 표현하지 못해서 그렇지 아이들이 이어붙이는 연상력은 굳어진 머리를 가진 성인들이 따라가기 힘들 것입니다.
이 책은 그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연상력을 자극해 줄 것입니다. 아하! 이렇게 말을 만들어도 되는구나, 단어와 문장을 만들어도 되는구나 하는 것을 '용인받는' 길도 됩니다. 많은 경우 교육의 내용(교과서)은 정제된 말들을 표준어 어휘와 표준어 발음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보여지는 세상은 그만큼 좁아질 가능성이 큽니다.
프......
슬프게
소쩍새 우네
배고프다고
솥이 적다고
솥적다, 솥적다, 소쩍, 소쩍
- '슬프게' 전문
어린이날을 맞이해 글자를 전혀 모르는 네살배기 조카를 위해 이 책을 샀습니다. 사고 나서 후회가 되었습니다. 억지로 글자를 아이들에게 입력시키는 꼴이 되지는 않을지 싶어서요.
읽다가 노파심이 나서 출판사 편집부에 전화했더랬지요. 그랬더니 친절하게 답변해 줍니다.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도 옆에서 부모가 읽어주기만 한다면 낱글자를 익히는 수준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다 훑고 노파심을 줄여보기로 합니다. 싫은 것은 싫은 내색을 분명히 하는 아이니까 이 책을 어떻게 접하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그 위에 초등학교 1학년 형이 있어서 그 아이에게는 이 책이 어떻게 읽혀질지 자못 궁금하기도 합니다.
사인펜으로 글을 써서 자랑하는 아이가, 우리말이 이렇게 풍성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리고 그 연결성이 엉뚱해도 된다는 것을 알면 속으로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왼쪽 페이지에 큼지막하게 낱글자 하나, 그리고 오른쪽 페이지에 동시와, 동시를 즐겁게 하는 그림이 빈 자리를 정말 자유롭게 메웁니다. 화가 윤정주 님도 시인만큼 풍성한 상상력의 소유자이고, 그 둘을 매끄럽게 이어준 편집디자이너의 솜씨도 칭찬할 만합니다.
게다가 문학평론가 유종호 님의 서문이 책을 빛냅니다. "놀이나 노래나 동시나 얘기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땅 위의 보배입니다" 그러시네요. 그런데 흔히 있을 시인의 후기 같은 글은 눈 씻고 봐도 없습니다. 동시만 담았습니다.
외국어를 배우면서의 곤혹스러움은 그걸 응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장 하나를 통째로 외웁니다. 그건 타국 언어자의 숙명이기도 합니다만, 열심히 공부해서 그 나라 언어의 맛깔스러움을 알아간 이들이라면 또다른 세상을 갖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저 아이들 심정이 되어서 동시를 쓴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익히게 만드는 목적도 이 책은 담고 있다고 봅니다. 교육이 아닌 교육을 통해서 우리말을 알게 되는 아이는 행복한 아이일 것입니다. 이 책은 놀이 그 자체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방송통신대 학보에도 투고했습니다.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집 1 - 모음 편
최승호 시, 윤정주 그림,
비룡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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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번역은 지금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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