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새신 묘 문인석(우측)박상진
지난 일요일(4월 29일) 오후 유일한 내시(內侍) 공신(功臣) 초상화의 주인공 묘역을 찾아 길을 떠났다. '내시와 궁녀 관계' 책을 출간한 바 있는 필자로서는 그동안 답사했던 어느 곳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이었다. 처음 소식을 접하고 탐방한 것이 2006년 4월이었으니 이번이 3번째 답사인 셈이다.
첫 답사 땐 서울 은평구 신사동 산 31번지 덕산(德山)중학교 뒷산이라는 정보만 가지고 무작정 답사 길에 올랐었다. 100미터 전방에서 학교 뒷담 뒤로 문인석이 있는 묘가 시야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저거다' 하는 예감이 들었다.
묘표는 원수형(圓首形) 2면비로, 비신 전면에 '忠勤貞亮扈聖功臣正憲大夫樂城君金公位之墓(충근정량호성공신정헌대부낙성군김공위지묘), 후면엔 피장자의 이름이 새신(璽信)이라 쓰여 있었다. 생각대로 그곳은 필자가 찾던 내시 초상화의 주인공 묘였던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인 김새신(金璽信 1555∼1633년)은 누구일까? 비문과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내시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왕인 선조(宣祖)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한 공로로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고, 낙성군(樂城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가 군보(君寶)이다. 묘는 쌍분(雙墳)인데, 묘표·상석·향로석·문인석 등을 갖췄다. 쌍분을 통해 부인과 함께 묻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호성공신에 책록된 인물은 84명인데, 이중 내시 출신은 김새신을 비롯해 무려 24명이나 된다. 이들 3등 공신에 봉해진 24명의 내시에겐 다음과 같이 실로 파격적인 포상이 내려진다.
'…은 3등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와 관작을 한 자급 초천한다.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 <선조실록> 37년 갑진(1604, 만력 32) 10월 29일(을해)조 기사에서
내시 공신의 묘역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