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식 가족주의의 과거지향성

[드라마 리뷰] SBS 월화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

등록 2007.05.04 09:04수정 2007.05.05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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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드라마는 늘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판타지의 정반대 지점에 존재한다. 호화저택과 휴양지가 배경으로 등장하고 재벌가와 전문직의 때깔 좋은 주인공들이 활보하고 다녀도, 남녀의 사랑은 로맨틱하지 않고, 지독하게 현실적이고 적나라하다.

사랑하는 젊은 남녀는 서로 사랑의 크기와 이해관계를 따지느라 티격태격하기 일쑤이고, 주인공들의 로맨스가 격정적일 때조차 그것은 낭만적인 대신 항상 위태롭고 불안하다. 그녀는 우리를 그들의 로맨스에 빠져들게 하는 대신, 로맨스에 빠져드는 캐릭터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공감하도록 극을 이끌어간다. 그리고 그 전략은 정말 탁월하다.

SBS 월화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정을영 연출)에서 불륜 남녀의 로맨스는 그러한 김수현식 로맨스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결과이다. 그것은 여느 불륜드라마들처럼 낭만적이거나 달콤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추하거나 난잡한 것도 아니다. 대신에 여기에는 금지된 것에의 욕망이 있고, 위반이 주는 짜릿한 격정이 있으며, 제어할 수 없는 순간적 정념이 있다. 그것은 안락하고 평온한 가정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하고 치명적인 사랑이다.

그리하여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것은 단지 가슴과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는 화영(김희애 분)의 란제리 패션도, 과도하게 농밀한 키스신이나 베드신도 아니다. 정말로 자극적인 것은 위험하고 치명적인 사랑이 몰고 온 한 가정에의 위협 그 자체이다. 사랑과 신의, 혈연에 기반 한 가정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공포와 위기의식이다.

그렇게 남편 준표(김상중 분)와 친구 화영의 사랑은 지수(배종옥 분)의 가정과 가족 전체를 파탄의 위기로 몰아넣는다. 불륜 현장의 발각으로부터 드라마가 시작되고, 지수의 언니 은수(하유미 분)가 지수 모르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화영과 사생결단의 육탄전도 마다 않는 것은 이 드라마에서 가족의 유지라는 과제가 얼마나 절대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착하고 정숙하고 헌신적인 천사와 뻔뻔하고 이기적이고 욕정적인 요부라는 지수와 화영의 대비적 성격은 구태의연하고 안이한 설정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성격들은 그들이 가정 안의 여자와 가정 밖의 여자라는 상반된 위치에 놓여있음을 손쉽게 드러내준다.

지수가 남편과 자식 보살피고 챙기기를 낙으로 삼고 자신의 안정된 삶을 봉사활동으로 연장시키는 중산층 주부의 위치를 차지한다면, 화영은 가정을 꾸리는 데 총체적으로 실패한 낙오자의 자리에 놓인다.


가정을 중심으로 한 지수와 화영의 대결

화영의 미국 결혼 생활은 꽤 불행한 것이었다. 그녀는 양가 가족들의 경제적 착취에 시달렸고, 여러 번의 인공수정으로도 아이를 가지지 못했으며, 무능력한 남편마저 죽어버렸다. 마침내 그녀는 양쪽 집 가장 노릇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형외과 의사라는 번듯한 직업마저 내팽개치고 귀국했다. 그녀는 지긋지긋한 가족의 굴레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다.


화영의 외형적 화려함과 냉소적이고 삐딱한 태세는 자신의 피폐함과 열패감을 가리기 위한 치장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또한 지수와 지수의 가정에 대한 의도적 도발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가 가든파티가 벌어지는 지수의 집 안쪽에서 버젓이 준표와 키스신을 연출할 때, 또 자신이 먼저 지수에게 준표와의 관계를 털어놓을 때, 그녀는 마치 지수를 망가뜨리고 지수의 가정을 깨뜨리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건 이 외로운 악녀가 온전하지 못한 사랑에 목말라하고 안달하면서도 언뜻언뜻 내비치는 짙은 허무의 빛깔이다. 그것은 인간이 한평생 살아봐야 별 볼일 있는 일이란 없다는, 그리 중요한 것도, 그리 대단할 것도,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무언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녀 인생의 쓰라린 깨달음 같은 것이다. 화영이 지수에게 준표를 나눠 갖자고, 셋이 살자고 충동적으로 제안할 때, 거기에는 허약한 부르주아 가정에 대한 조소어린 공격이 숨어 있었다.

이처럼 지수와 화영의 대결은 가정이라는 체제를 중심으로 팽팽한 긴장을 형성한다. 지수가 준표와 화영 양자에게서 느끼는 극도의 분노는 인간적 관계에 대한 배신감인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쌓아올린 가정이라는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린 데 대한 모멸감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유지해온 성공적 결혼생활이라는 환상을 거둬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은수가 지수에게 누누이 설명해대는 가정이라는 현실적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여자들과 남자들의 속성들, 생존본능과 서로에 대한 적당한 기만과 현실안주를 위한 타협 등등을 어쩌면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이미 실행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김수현 드라마의 통속성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가정이라는 것이, 가족이라는 관계가 깨지기 쉬운 허상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이라는 얄팍한 허울의 여전한 유효성을 입증해내는 것이다. 배신에 치를 떨던 여자가 망가져가는 자신을 추슬러 다시 가정을 복구시키려는 독한 현실감과 생존욕구를 되찾는 것이야말로 오랜 세월 우리 여성을 지배해온 몸에 밴 습성 아니었던가.

그런데 드라마가 긴장이 떨어지고 재미없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그것은 정확히 지수가 별거를 택하는 순간부터이다. 그녀가 준표의 사랑이 화영의 것임을 알았을 때, 마침내 그것을 인정하고 그를 화영에게 보냈을 때, 이제 모든 상황은 역전되기 시작한다.

과거를 향하는 김수현식 가족주의

사랑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유지하려는 지수의 타협책은 고색창연하게도 남편의 이중생활을 용인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지수가 두 사람에게 가하는 복수이기도 하다. 준표에게는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역할과 사랑하는 여자의 연인 역할이라는 분열이 형벌처럼 주어졌다. 화영은 여전히 준표를 온전한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도권은 화영에게서 지수에게로 넘어왔다. 이제 중요한 것은 준표의 사랑이 아니라 가장이라는 그의 자리이고, 가장이라는 자리를 손에 틀어쥔 지수가 유리한 입장에 놓이는 것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온전한 결합을 막는 방해자로서 합법적 아내 자리의 막강한 권력이 지수에게 주어졌다.

지수의 결정이 타협이건 복수건 또는 미련이건, 그것이 시대착오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조강지처의 특권이 먹히기에는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게다가 별거라는 시간의 유예는 주인공들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한 드라마적 포석처럼 보인다.

준표와 화영이 동거에 들어가자마자 사랑은 일상으로 빠르게 바뀌기 시작하고, 허울뿐인 가장의 자리, 아내의 역할은 그 필요한 순간이 더욱 잦을 분위기다. 준표는 벌써부터 자신이 마지못해 팽개친 지수의 아내 자리를 그리워하고, 화영에게 아내의 역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지수의 새로운 남자 석준(이종원 분)은 준표의 질투를 자극함으로써 사라져버린 준표의 지수에 대한 사랑을 되찾아줄 것이다.

무엇보다 제 페이스를 잃어버린 것은 화영이라는 캐릭터다. 그녀가 아내의 역할을 요구하는 준표의 이기심을 받아들일 때, 준표가 내민 생활비봉투에 감동할 때, 그녀가 진정 원한 것이 단지 사랑인지 울타리가 되어줄 가장이 있는 가정인지 쉽게 분간이 가지 않는다. 가정이나 가족이라는 체제의 속박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던) 화영의 자유분방함은 이제 그 매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이 드라마는 고전적인 가정의 복구를 위해 달려간다. 온통 마음을 사로잡은 열정도 불 같이 뜨거운 광기도 기나긴 인생에서 한순간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남는 것은 안정적인 경제공동체와 역할분담과 혈육의 정 등등이다.

그리하여 <내 남자의 여자>는 부르주아 가족체제 내부에 도사린 항시적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포착하면서도(또는 자극적으로 일깨우면서), 동시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하고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 세련된 외피에도 불과하고 김수현식 가족주의는 아쉽게도 여전히 과거를 향해 있다.
#김수현 #내 남자의 여자 #가족주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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