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고맙습니다> 포스터.MBC
드라마 <고맙습니다>에서 봄이가 주목을 받고 있다. 한쪽에서는 에이즈에 감염된 봄이가 에이즈 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불식시키는데 일조를 하지 않겠는가 기대도 한다. 과연 그럴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다른 편견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너무 아름답게만 고맙게만 그리기 때문이다.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서 드라마가 선택한 것은 아이의 치명적 질병이다. 그것도 반드시 죽게 되는 에이즈라는 질병이다. 더구나 그의 엄마는 미혼모다. 미혼모에 딸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 섬은 불행한 그들이 갇혀 사는 고립의 공간이지만, 드라마는 아름답게 그린다. 그렇게 그리는 이유는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서다. 그들의 불행은 결국 감동을 위한 장치였다.
죽어가는 어린 아이, 봄이를 설정한 것도 대단하다. 이 드라마에서는 아이가 갈등의 원인은 아니지만, 어른들의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 죽는 도구가 된다. 정작 대단한 것은 따로 있다. 봄이는 죽을병에 걸렸고, 그 병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수혈로 걸렸는데, 성인군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점이다.
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초탈하고 맑고 순수하며 따뜻해야 하는 것일까? 더구나 외부 반응에 즉응적인 아이가 말이다. 드라마에서 아이 봄이는 인간적이지 못하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다. 도대체 저런 아이가 있을까 싶다. 물론 작가는 그러한 장면과 대사, 장치들을 사용할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 꿰고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노하우는 결국 편견을 오히려 더 만들어낸다. 고통과 아픔, 아니 질병이 감동의 대상이 되는데 문제가 될 것은 없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아이는 순수하고 맑아야 한다는 편견이다.
백남준이나 천상병은 꼭 어린 아이와 같았는데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무서우면 무섭다라고 말하고, 원망은 원망대로 하며, 화가 나면 화를 낸다. 봄이는 죽을 병에 걸렸어도 세상을 다 용서해야 한다. 어린 성자의 탄생이다. 봄이는 어린 아이가 아니고 어른들의 또다른 투영체로 보인다. 드라마를 통해 아이들은 이러한 어린이 상을 형성한다. 어른들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 상이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어린이 상이다.
여전히 한국 드라마는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고, 아이는 어른의 감성을 위한 존재로 대상화 된다. 성인 군자형 아이는 다만, 미디어가 어른 시청자를 위해 발라주는 아바타일 뿐이다. 에이즈 환자에 대한 주목은 <너는 내 운명>에서 예견되어 있던 아이템이다. 여기에 낭만적 휴머니즘이 결합된 <고맙습니다>는 봄이가 착하고 맑고 선한 아이라 더 살리고 싶다. 물론 그렇지 않으면 살리고 싶은 마음이 나겠나 싶다.
불행과 고통이 감동의 수단이 될 때 현실성은 사라진다. 또한 그 고통을 현실적으로 감내할 수단도 언질하지 못하고 만다.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 중에 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얼마나 될까. 대개는 불치병과는 관계가 없기에 찡한 감동을 느끼고 나면 뿌듯할 것이다. 어차피 자기와 관련이 없는 일이니 말이다. 오히려 그러한 일상이 없는 지금의 삶에 감사해 하면서 눈물 흘리고 잊어버리면 된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대상화하고 희화화하면서 극적 이완의 장치를 사용하는 이들은 치매에 걸리지 않았기에 맘대로 다룰 것이다. 불행과 고통, 소외를 다룰 수는 있지만 낭만과 순수, 극적 감동이라는 관점에서만 다루면 반휴머니즘적이다. 또 다른 편견 강화와 휴머니즘의 수단화 때문이다. 섬에 대한 환상으로 촬영장이 러시를 이루면 지역경제가 산다고 하니 그런 면에서 드라마 <고맙습니다>의 의미가 더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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