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자막, 도대체 누가 만드는 거야?

미드 세계의 숨은 공신, 자막쟁이들... '뿌듯함'이 보수

등록 2007.05.08 14:06수정 2007.05.0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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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드라마인 '미드' 초보와, 고수, 그리고 지존을 나누는 기준은? 네이트 드라마 24에 올라온 글이 제시한 기준은 이랬다.

자막이 없을 때? 미드 초보는 자막팀이 자막을 만들어줄 때까지 기다린다. 미드 고수는 자막 없이 본다. 보면서 영어 실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 미드 지존은? 한글 자막을 직접 만든다.

지금의 미드 열풍을 있게 한 것은 어쩌면 이들의 공로가 크다. 한글 자막을 만드는 이들. 이들이 있어 미드 감상의 길이 열린다. 물론 이건 '어둠의 경로'다. 따라서 대개 실명보다 예명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많다.

그럼 누가 왜 한글 자막을 만드나? 누가 돈이라도 집어주나?

의학 드라마 번역하려고 의학 감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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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초능력이 있음을 알게된 이들이 벌이는 고군분투기, 미드 <히어로즈>. ⓒ 캐치온

미드 폐인들은 미국에서 드라마가 방송되자마자 바쁘다. 미국 인턴들이 연애와 의사수업을 병행하는 <그레이 아나토미> 팬들은 미국 시각 목요일 저녁 9시가 지나면 바쁘고, 닥터 하우스의 기이한 천재 행각이 돋보이는 <하우스> 팬들은 미국 현지 시각 화요일 저녁 9시가 지나면 바쁘다.

기다리던 드라마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들은 방송이 끝나면, 대개 P2P 파일 공유 사이트에서 드라마를 찾아 다운받아 본다. 실시간에 버금갈수록 자막작업도 빨라진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미국 드라마이니 당연히 주인공은 영어로만 말한다. 그럼 '네이티브 스피커'만 미드를 보나? 천만에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게 한글 자막이다. 미국에서 드라마가 방송된 뒤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영문 자막과 곧이어 한글 자막이 배포된다. 영어 대본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누군가 방송을 보고 친 영어 자막이다.

자막은 그저 한글을 치는 걸로 이뤄지지 않는다. 고도의 숙련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저 번역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과 자막이 딱딱 맞아떨어지게 맞춰주는 작업인 '딕테이션'과 '싱크'를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막을 만들게 도와주는 프로그램까지 있다.

자막을 만드는 방법도 갖가지다. 여럿이 팀을 이뤄 분업해 속도와 정확성을 높이기도 하고, 혼자서 '스피드'에 주력할 때도 있다. 팀 작업일 때 의학드라마는 1차 번역자가 번역을 하면 2차로 의대생이나 의사가 직업인 누리꾼이 감수를 한다. 마지막으로 매끄럽게 읽히도록 교정하는 이도 있다.

누가 돈이라도 집어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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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인사이드 '제씨'는 umakoo란 이름으로 <히어로즈>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NBC TV <히어로즈> 한글 자막을 만든다. ⓒ NBC

이런 미드 자막을 만드는 곳은 네이트 드라마24(http://club.nate.com/24)나 네이트 NSC (http://club.nate.com/tsm), 디시인사이트 '미드갤', 다음 '미국 드라마 24시'가 유명하다. 이 사이트들을 이용하거나 미드를 볼 때 애용하는 프로그램인 곰플레이어의 '자막 찾기'를 이용해 한글 자막을 찾는 방법도 있다.

이들에게 별다른 혜택 같은 건 없다. 화면 맨 처음이나 맨 끝에 자막 만든 이 이름을 사인처럼 적는 게 전부다. 최근엔 단순히 번역을 넘어, 자막 중간 중간에 자막 만든 이가 단 감상이나 코멘트까지 넣어 재미를 더한 자막까지 생겨나고 있다. 혹자는 자막 다는 이들 스타일까지 파악해 자막을 고른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왜 자막을 만드나? 대개 처음 미드 감상에서 시작해, 원하는 자막이 없을 때 직접 만들기로 뛰어든다. 또 영어 공부를 위해서 만드는 이도 있다.

네이트 드라마 24(ND 24)에서 활동하며 최근 < ER > 한글 자막을 만드느라 바쁜 오원석씨는 "어느 날, 영어공부하려고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는데, '이거다!'고 '필'이 딱 꽂혔다"고 했다. 바로 한글 자막작업을 해야겠단 계시였다.

영어 공부도 하면서, 자막 없어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과 그가 좋아하는 < ER >을 같이 보고 싶어서 자막 번역을 시작했는데, 하고나니 진짜 영어 공부가 됐다.

또 무엇보다 자막을 만들고 나면 뿌듯했다. 그는 현재 캐나다에서 4년째 유학중인 학생이다. 우리 나이 열아홉인 고3이다. 오원석씨는 < ER > 자막팀 활동만이 아니라, ND24에서 <고스트 앤 크라임(원제: 미디엄)> 딕테이션도 맡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처음엔 번역 고민, 나중엔 말 줄이기 고민

디시인사이드에서 주로 활동하며 디시인사이드 '미드갤'에 <히어로즈> 한글 자막을 올리는 '제씨(예명)'는 자신이 단 자막에 'umakoo'라는 아이디를 쓰며 활동한다.

제씨가 미드에 빠진 건 김윤진이 출연해 화제가 된 드라마 <로스트>를 통해서였다. 때 그는 "달린다"는 뜻을 알았다고 했다. "달린다"란 말은 미드 한 편을 보면, 계속 다음 편을 보느라 시간이 어찌 가는 줄도 모르고 연달아 미드를 보는 걸 일컫는다.

그 뒤 <프리즌 브레이크>를 보며 본격적으로 미드에 빠져들었고, 자막에 '디씨 미드갤 000 제작'이라고 남겨놓은 걸 보고 디시인사이드 '미드갤'도 찾았다. 그렇게 빠져들어 여러 미드를 섭렵하기 시작하자, 올 것이 왔다.

<히어로즈>를 보는데, 답답했다. 한글 자막이 금방 나오지 않아서였다. 제씨는 기다리다 지쳐 "기다리는 김에 번역이라도 해보자"고 뛰어들었다. 그게 지난 해 11월이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그는 <히어로즈> <더 프리텐더(The Pretender)>등 합해서 에피소드 37개의 한글 자막을 만들었다.

처음엔 번역 자체가 힘들었다. 속어·은어까지 챙겨야 해서였다. 하지만 할수록 다른 문제가 나타났다. 어떻게 하면 꼭 맞는 우리말로 바꾸나 고민하게 됐고, 이젠 요령도 생겼다. 제씨는 "요즘은 직역을 하기보다 적절한 표현으로 의역을 하면서 최대한 문장의 길이를 줄이는데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배우가 긴 대사를 빨리 말한다고 해서 그 긴 말을 그대로 옮겨 적어서 자막으로 화면을 꽉 채우는 단계는 지나갔다. 제씨는 가장 힘든 게 "최대한 생략하면서 내용상 부족하지 않게 우리말로 바꾸기"라고 강조했다.

드라마도 보고 영어 공부도 하고 다른 사람도 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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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그레이 아나토미> ⓒ ABC

제씨는 또 "처음 작업했을 때 내가 작업한 자막으로 보니 더 재밌더라"며, "(내가 만든 자막을) 본 이들로부터 피드백도 받고 칭찬도 받아보니 보람도 생겼다"고 했다. 또 같은 미드에 다른 이들이 작업한 한글 자막을 보면서 비교하고 배운다.

그는 "그래도 <히어로즈>는 다른 드라마에 비해 전문 용어나 어려운 은어들이 적어서 (번역하기) 유리한 것 같다"며 "의학 드라마나 법정·법률·수사 드라마 등에 참여하시는 분들 중에는 의대·법대 분들도 계시다고 들었는데, 정말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미드 열풍은 영어 열풍과 만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중이다. 아니다. 정확히 세 마리 토끼다.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도 보고, 영어 공부도 하고, 다른 이들에게 내가 만든 자막으로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도록 도와준다.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지만,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뿌듯하다." 봉사는 원래 힘이 세다.
#미국드라마 #자막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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