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서평] 류시화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법정 잠언집)

등록 2007.05.21 14:59수정 2007.05.2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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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제가 가끔 가던 곳 중에 길상사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본 지 햇수로 2∼3년이 되었는데, 지금이나 예나 분위기는 그대로일 것입니다. 번듯한 집들 한가운데, 달리 말해 세속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앉아 영혼의 쉼터가 되는 곳입니다.

서울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 역에서는 꽤 먼 길이어서 마을버스를 타고 가기도 하지만 호젓한 성북동 길인지라 애써 걸어가곤 했습니다. 걷다 보면 벽화도 볼 수 있고, 몇십 년 된 것 같은 방앗간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으리으리한 집들과 대사관들도 보게 되지만요.

그 근사한 집들 사이로 정말 좁은 대지를 최대한 살린 작지만 천장 높은 멋진 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성북동 성당입니다. 이곳 2층에 올라가 미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조금은 기묘한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성북동 오실 일 있으시면 한 번 (가능하면 2층에) 들어가 보십시오.

얼마 있으면 그날이지만, 언젠가 성당 바깥에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산사를 찾아 산길을 걷듯 조금만 더 올라가면 길상사입니다. 길상사(吉祥寺)의 의미가 마음에 듭니다. '좋고 상서로움이 있는 절'.

언제는 운 좋게 새벽 6시에 범종각에서 타종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가파른 성북동 지대 따라 역시 가파르게 놓여있는 길상사에서 퍼져 나가는 종소리는 그대로 지대를 따라 흘러갑니다. 소리에도 중력이 작용할까요. 소리는 공기의 진동이므로 사방으로 퍼지겠지만 그 '알량한' 질량 때문에 범속한 일상이 있는 아래쪽으로 쏠려 내려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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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 닮은 관세음보살상. 가톨릭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님은 '불모(佛母)'라는 표현을 썼다. ⓒ 박태신

제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물론 그 고즈넉함으로 인해 쉼을 얻는 이유도 있지만, 초입 길을 잠시 지나 갈림길 앞에 놓여 있는 관세음보살상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관세음보살상은 가톨릭의 성모님을 닮았습니다. 이 석상을 만든 이도 가톨릭 신자인 최종태 조각가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 포용력이라고 할까 하는 것이 이곳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불교와 가톨릭은 서로 친근한 구석이 참 많습니다. 아참! 성탄절에는 사찰 입구에서 축하 플래카드를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정말 운 좋게 법정 스님이 신도들과 함께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길상사를 창건한 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주지 스님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회주(會主 :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님이십니다.

그런데 2003년에 그 자리를 내놓으셨다는 것을 길상사 홈페이지 들어가 보고서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지 스님 아니 회주 스님 같지 않은 회주 스님입니다. 상주하시지 않을뿐더러 외부인인 제가 보기에는 운영에도 크게 관여하지 않으실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분에 대해 제가 아는 걸로는, 이 분이 언젠가 명동성당에 한 번 오셔서 강의를 하시고, 반대로 아마 그때가 길상사가 처음 문을 열 때인 걸로 기억하는데, 김수환 추기경님이 축하 방문을 하신 것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저서 <오두막 편지>를 반 정도 읽은 것(아주 한참 전인데 그 책을 다시 들춰보니 밑줄 친 흔적이 중간쯤까지밖에 없네요). 산속에서 혼자 지내신다는 것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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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화로운삶

이번에 소개하는 책은 그 분의 책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입니다. 이 책은 법정스님의 지인인 류시화님이 "30년 넘게 써온 그의 글과 법문에서 한 편 한 편 가려 뽑은" 잠언집입니다.

한 사람의 '입과 손에서 정성스레 나온' 말과 글 중에서 감동적인 것들만 뽑은 노력을 대신 해주었으니 고마울 따름이지요. 이 책 한 권으로 범속한 이들이 몇십 권을 읽는 결과를 갖게 해주니까요.

이렇게 대신 '밑줄 그어주고' 남들이 읽게 모아주는 일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밑줄 쳐진 몇 구절 때문에 감동하고 삶을 다시 돌아보고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잠깐의 여유를 갖습니다.

책 소개를 하는데 서론이 길어집니다. 사실 책 소개를 한다면 여러 인용구절을 끄집어 내게 마련입니다. 제가 밑줄 긋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류시화님이 애써 그렇게 해놓은 책이라 모든 내용이 다 인용구절이 됩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책 어디든 들춰보십시오.

어쩌다 보니 요즘은 여백이 많은 책을 자주 보게 됩니다. 궁금한 것은 이 책 곳곳을 장식하는(때로 소주제들과 매치가 잘 되는) 사진을 찍은 이의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진이 작품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답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진들이거든요. 앞표지부터 본문을 거쳐 뒤표지까지 쭉 한편의 흑백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책 소개 글을 쓰는 즐거움은 그래도 '제 밑줄'을 그을 수 있는 자유에 있습니다. 가슴의 징을 치고 가는 구절들은 독자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범종각의 종소리가 퍼져가듯, 독서는 그렇게 여러 밑줄 쳐진 구절들이 때로는 겹쳐지면서 커지고, 때로는 잔잔한 독음이 되면서 퍼져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비약이겠습니다만 좋은 책이 많은 이에게 읽혀질수록 한 사회의 일상의 모습도 달라지고 그 형언할 수 없는 총계치도 달라지겠지요. "하루 한순간만이라도 순수하게 홀로 있는 시간(독서의 시간도 그 중의 하나겠지요)을 갖는다면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런 독서를 할 때는 "텔레비전과 신문을 무조건 멀리하라"라는 경구가 이해됩니다. 우리를 흥분시키고 슬프게 만들고 노심초사하게 만들고 결국엔 좋은 책 읽은 기억을 상쇄시키고 마니까요.

그리고 제 경험담을 덧붙이고 해석할 수 있는 자유도 있습니다. 책 소개 글을 쓰다 보면 그 책을 잘 알게 되는 것보다 저 자신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아하! 내가 이런 것을 좋아하는구나, 이런 것에 눈길이 가는구나, 이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하는. 그래서 법정 스님은 거듭해서 자기 자신이 되라고 거듭 말합니다.

"참된 앎이란 타인에게서 빌려온 지식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몸소 부딪쳐 체험한 것이어야 한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을 만들어간다."


몇십 년 이력이 녹아 있는지라 읽다 보면 법정 스님의 감성의 다양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드물지만 법문 그대로의 느낌이 나는 글에서, 칼날 같은 엄중한 글, 끝없이 자신을 수양하는 글 그러니까 남을 위한 글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글, 인간적인 면모의 글, 자연을 보고 감탄하는 글, 소녀같이 부드러움이 넘쳐나는 글에서까지 다양함을 맛봅니다. 이것 역시 잠언집의 매력입니다. 스님이 이런 글도 쓰셨네요.

"가을은 참 이상한 계절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 두고 싶다."

"나는 아직도 이런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 다음 어딘가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집을 한 채 짓고 싶다. 사람이 살기에 최소한의 공간이면 족하다. 흙과 나무와 풀과 돌, 그리고 종이만으로 집의 자재를 삼을 것이다…… 이런 꿈이 설사 희망 사항에 그친다 할지라도 지금 나는 풋풋하게 행복하다." ('나의 꿈' 중에서)


더 본래의 스님다운 글들을 살펴볼까요?

스님은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정체되지 말라고 늘 새로워지라고 자주 말하십니다. "자신의 삶에 녹이 슬지 않도록 늘 깨어 있으"라고.

오해도 풀었습니다. 무소유의 개념이 그것입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복에 관한 말씀도 많습니다.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렇죠.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역설도 접합니다. "내가 평소 타인에게 나눈 친절과 따뜻한 마음씨로 쌓아 올린 덕행만이 시간과 장소의 벽을 넘어 오래도록 나를 이룰 것이다."

명상과 침묵은 스님의 단골 메뉴입니다. "명상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사물의 실상을 지켜보고 내면의 흐름을, 생각의 실상을 고요히 지켜보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을 하지만 침묵을 지킨다. 필요 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는 직선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미관상, 느낌상 말입니다. 무언가 시원하게 뻥 뚫린 기다란 길을 보노라면 눈이 평안을 얻습니다. 그런데 저를 한 대 치십니다.

"사람의 손이 빚어낸 문명은 직선이다. 그러나 본래 자연은 곡선이다. 인생의 길도 곡선이다. 끝이 빤히 내다보인다면 무슨 살맛이 나겠는가. 모르기 때문에 살맛이 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곡선의 묘미이다. 직선은 조급, 냉혹, 비정함이 특징이지만 곡선은 여유, 인정, 운치가 속성이다."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생각과 똑같은 말도 하십니다.

"기차 여행은… 꿈에 그리는 집에 사는 기능의 얼마나 훌륭한 훈련인가! 꿈에 그리다가 받아들였다가는 거부하는 집들의 영상을 펼쳐 나간다 …… 자동차로 여행할 때처럼 그 어느 집에 멈춰 설 유혹을 결코 느끼게 하지 않으면서." (<공간의 시학> 중에서).

그러니까 자기 소유가 아닌 멋진 집들을 기차 타고 가면서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같은 책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괴벽'을 '변명'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집을 볼 수 있는 내 두 눈만 있으면 족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님은 말합니다. "만일 이 산이 내 소유라면 그 소유 관념으로 인해 잔잔한 기쁨과 충만한 여유를 즉각 반납하게 될 것이다 …… 다행히도 이 산은 내 개인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바라볼 수 있다. 차지하는 것과 보고 즐기는 것은 이처럼 그 틀이 다르다."

이렇게 스님의 글들을 마음껏 인용했습니다. 아마 읽는 이들에 따라 감흥은 다를 것이고 저는 그저 소갯글을 쓸 뿐입니다. 어쩌다 보니 5월은 책을 많이 접하게 되는 달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모든 선물은 책으로 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책은 범람하는데 독서량은 많지 않은 게 우리나라 현실입니다.

책은 또 다른 책을 불러냅니다. 이 책 속에서 마르틴 부버의 <인간의 길>이 나옵니다. 전에 읽었던, 소개하고 싶은, 아주 얇은 책이지만 묵직한 감동을 주는 책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가족의 달, 자녀에게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목적으로라도, 중간고사 끝나고 기말고사가 멀찌감치 있는 축제의 달 5월에 많은 책을 접하면 좋으리라 사견을 덧붙입니다. 교회 다니시는 저희 어머님도 지금 이 책을 읽고 계십니다. 이럴 땐 다시 '텔레비전과 신문을 무조건 멀리' 하면서요. 왜냐하면,

"살아 있는
모든 이웃들이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


이를 직감하기 위해서라도….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 법정 잠언집

법정(法頂) 지음, 류시화 엮음,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2006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류시화 #법정 #잠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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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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