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가지 목소리가 들려주는 천일의 이야기

[서평] 마루야마 겐지 <천일의 유리(瑠璃)>

등록 2007.07.01 14:48수정 2007.07.0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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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문학작품들이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면서 서점 진열대를 장식하는 일본 소설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불을 댕긴 일본 작가는 누가 뭐래도 무라카미 하루키일 것이다. 1990년대 국내에 불어닥친 하루키 신드롬은 일본에서의 한류처럼 양국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문화적 장벽을 허무는 데 단단히 한몫했다. 비록 지금은 하루키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고 문학평론가들로부터 과대포장되었다는 얘기까지 듣고 있지만 그로부터 시작된 일본 문학 열풍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10여 년 전 하루키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지금은 더 많은 일본 작가들이 나누어 갖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무라카미 하루키와 더불어 한국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일본 작가들로는 요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류, 아사다 지로, 마루야마 겐지, 유미리(재일동포) 등이 있다. 그리고 최근 북폴리오(대한교과서)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신진 및 중견 작가들, 온다 리쿠, 가네시로 가즈키(재일동포), 가타야마 교이치, 와카타케 나나미 등의 영향력도 꾸준히 확대되는 추세다. 그중에서도 <흑과 다의 환상> <황혼녘 백합의 뼈> <빛의 제국> 등을 쓴 온다 리쿠의 약진과, 이준기가 출연한 영화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원작자인 가네시로 가즈키의 활약이 특히 눈에 띈다.

일본문학과 한국문학의 외형적 불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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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이처럼 오늘날 일본 문학은 한국 독자들의 안방 깊숙이 들어와 있는 데 반해 한국 문학의 일본 진출은 아직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문학이 일본 문학에 비해 수준이 낮다거나 하는 식으로 자학할 필요는 없다. 이런 외형적 불균형이 문학 수준의 차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사실, 최근 국내에 유입되고 있는 일본 문학작품들 중엔 한국 독자 취향에 맞지 않거나 문학 작품으로서 별다른 가치나 매력을 찾아보기 어려운 그저 그런 작품들도 많다. 한류에 편승해서 그저 그런 한류 콘텐츠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한국 문학의 위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한 분들이 있다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문에 나오는 한 구절을 들려드리고 싶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나 역시 예전엔 한국 문학을 평가절하하고 도외시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외국의 고전이나 명작을 읽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한국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그 이후부터 한국 문학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 문학이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틀림없이 앞으로 한국 문학이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한국 독자들이 한국 문학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가 아닐까?


괴짜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

최근 일본 문학이 한국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한국 문학에선 좀처럼 접하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일본 문학은 나름대로 뚜렷한 강점과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추리나 판타지 장르를 접목한 소설들은 차별화된 개성과 강렬한 색채로 한국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온다 리쿠의 작품들, 와카타케 나나미의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등이 그런 경우다.


물론 이미 오래전부터 독특한 개성으로 눈길을 끌어온 마루야마 겐지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본에서도 소문난 괴짜 소설가다. 그러나 나쁜 의미의 괴짜가 아니라 좋은 의미의 괴짜다.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온 그에게서 장인(匠人)의 면모가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의 글은 독특하고 강렬하다. 때론 고대 애니미즘을 숭배하던 원시인처럼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연과 교감하고 대우주와 소통하는가 하면, 전체주의로의 회귀를 꿈꾸는 일본 극우세력을 향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천 가지 시점, 천 가지 이야기

최근 발간된 <천일의 유리(瑠璃)>는 마루야마 겐지 문학의 정점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특히 천 개의 시점으로 천 일 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독특한 형식은 문학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엎는 획기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문학 작품을 구성하는 시점에는 1인칭 주인공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작가 관찰자 시점 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시점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화자(話者)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천일의 유리>에 등장하는 화자는 무려 천 가지에 달한다. 정확히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중복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중엔 바람, 비, 별빛, 짐승, 호수 등과 같은 자연이 있는가 하면 애국심, 교육, 근심, 소망, 자유 등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도 있다. 그 외에도 금메달, 결혼식, 퇴학, 생일, 유언 등등, 이 세상에 '나'라는 화자가 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대서사시나 대하소설도 아니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기껏해야 단편소설 분량, 아니 종이 한 장 정도면 충분한 분량이다. '마호로'라는 작은 산골 마을에 불어닥친 개발 열풍이 핵심 줄거리인데, 만약 일반적인 서술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정말 단편소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흡사 박영한의 <왕룽일가>나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쯤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마루야마 겐지는 일반적인 서술 방식 대신 천 개의 화자를 번갈아 등장시키며 단편적으로 줄거리를 암시하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환상적이고 신비한 한 편의 신화(神話)로 만들었다. 천 개의 시점으로 천 가지의 목소리를 내려면 삼라만상의 이치에 정통하고 모든 사물과 개념에 대한 깊은 이해가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루야마 겐지는 세상과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작가임에 틀림없다.

새가 된 소년

<천일의 유리>에 등장하는 마호로 마을은 작게는 세속적 욕망과 씨름하는 인간사회를, 크게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우주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자연을 닮은 순수한 소년 요이치가 있다. 그는 비록 "마비된 뇌 탓에 제멋대로 춤추는 육체를 지닌" 장애아지만 개발 열풍 속에 망가져 가는 인간 군상과 대자연을 복원할 유일한 가능성을 지닌 인물이다.

소설이 결말에 이르면 광풍처럼 휘몰아치던 개발 열풍은 사업을 추진하던 회장의 죽음과 함께 어이없이 소멸되고 만다. 낙후된 산골 마을에 한 줄기 빛과도 같았던 개발 사업이 좌초되자 마호로 주민들의 절망과 허탈감은 극에 달한다. 그때 그들의 절망과 허탈감을 진정시킨 것은 다름 아닌 요이치의 기이한 죽음이었다. 평소 새처럼 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요이치가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큰 유리새와 함께 절벽에서 몸을 날린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요이치의 시신은 절벽에서 한참 떨어진 호수에서 발견되었다. 마치 새처럼 날기라도 한 것처럼.

어쩌면 작가는 인간사회에선 결코 환영받지 못했던 한 소년에게 신화적인 죽음을 부여함으로써 파멸해가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한 연민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 요이치의 순수한 삶을 통해 오늘날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인류에게 경고와 구원의 메시지를 보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최근 수많은 일본 작가들이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절대로 놓쳐선 안 될 작가를 꼽으라면 개인적으로 마루야마 겐지를 추천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마루야마 겐지, <천일의 유리 1, 2>, 문학동네, 2007, 김난주 옮김.
가격 각각 11,000원

덧붙이는 글 마루야마 겐지, <천일의 유리 1, 2>, 문학동네, 2007, 김난주 옮김.
가격 각각 11,000원

천 일의 유리 1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문학동네, 2007


#마루야마 겐지 #천일의 유리 #일본문학 #일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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