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시에 대한 편견

[서평] 고영서 시집 <기린 울음>

등록 2007.05.09 18:21수정 2007.05.10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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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서의 시집 <기린울음> 곁 표지에 적혀 있는 고재종 시인의 추천사에는 "고영서의 시들은 기본적으로 민중시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민중시가 갖고 있는 실천적 의식에 대한 기대를 갖고 <기린 울음>을 읽는다면 실망하기 딱 좋다.

민중시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실망의 정도가 달라지겠지만, 70년대 부패한 군사정권에 대해 민중의 시각에서 투쟁적 시어를 구사했던 김지하나 사회문제에 대한 고발을 담았던 80년대의 김남주 등의 시를 기대한다면, 비록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고영서의 시는 오히려 서정시에 가깝다.


그러나 T.S. 엘리어트의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는 말이 있듯이, 민중시에 대한 70, 80년대식의 기대를 접어두고 고영서의 시를 읽다 보면, 그 속에 민중의 삶의 모습이 애잔하게 깔려 있어 민중시의 지평을 넓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 민중시하면 떠올리게 되는 투박함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있는 시들을 만나보자.

성난 트랙터 궛가에 윙윙댄다
이렇게 우스꽝스런 체위로
내일은 무엇을 먹어야 하나
워낭소리가 상여를 끌고 솟구치는 하늘에
부러진 보습의 눈물이 흥건하다

- '오후를 쟁기질하다'


경지 정리와 기계화를 통한 부농을 꿈꾸던 어느 시골, 부지런한 농부에게 남은 것은 '부러진 보습' 밖에 없는 참담한 현실 앞에서 흥건한 눈물과 함께 해체되고 있는 고향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들놈보다 웃자란 고리대금 이자 카드빚" 쪽잠


그렇게 피폐해진 현실은 고리대금에 허리가 휘고, 단잠은 꿈도 못 꿀 일이 되고 만다.

누구의 기척일까, 바람에 흠씬 두들겨 맞은 눈발들이
봉창을 두드린다. 초등학교 졸업반이면 그해 겨울
할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진 땡볕 만나는 싸우디로 막일 가셨다.


- '강설기(降雪記)'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기를 쓰시던 할머니는 가난과 질병을 안고 돌아가시고, 속울음을 삼키시던 아버지는 타는 불볕 하늘 아래 '싸우디'로 가셔야 했던 날들을 기억하는 시인의 가슴엔 바람에 흠씬 두들겨 맞은 눈발이 날린다.

이렇듯 시인은 고향의 상처받고 힘없는 민초들을 그리면서도 결코 투쟁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질곡 많은 삶을 살면서 '끽'소리 못하고 살아온 민초들을 '기린 울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함부로 토해내지 못한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
길어졌을 목

- '기린 울음' 중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던 시절에도 속은 타들어가기 마련.

음머-하고 터트리고 싶은
그 소리의 가없음으로

타는 노을

- '기린 울음' 중


고향의 아픔을 말하기 무섭게, 시인의 의식을 파고드는 기억은, '5월의 광주'이다. 그 기억은 16mm 영화 속에서 만났던 광주천에 넘쳐나던 5월의 희생자들이었다. 곤봉, 군홧발들, 총부리들에 쓰러진 사슴의 깊은 눈을 닮았던 아무 말 없던 사내에 대한 떨칠 수 없는 기억은 오늘 이 시대에 함께 하고 있다고 시인은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굴비 두름처럼 끌려간 친구 대신, 아비 대신
금방이라도 후려칠 듯한 곤봉의 사내 대신
어느 절정의 노래가
빙의의 몸으로 돌아왔구나

- '사슴 사내'


고향과 5월의 기억을 지나 서울살이까지 이어지는 고영서의 시를 읽다 보면, 삶에 대한 잔잔한 애정이 묻어난다.

철거를 앞둔 쪽방에서도, 아침마다 똥을 누고 나오다 민망하게 마주치는 눈길이 있는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서울 변두리(노원마을)에서도 '60촉 희망'을 켜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시인은 삶의 한 편을 이렇게 기록했다.

새벽잠 깨어나면
옷 껴입고 갔다 와야 시작되는 하루
출근카드에 도장을 찍듯
한 덩이 누고 나면 가뿐해질까
돌돌 말린 화장지에 밑금을 닦고 있으면
똑똑 노크소리
후다닥, 뛰쳐나오다 눈 마주치면
민망하여라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그 위에
무시로 쌓일
똥탑

- '노원마을 공중변소'

덧붙이는 글 | 고영서: 2004년 광주매일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덧붙이는 글 고영서: 2004년 광주매일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기린 울음

고영서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 2007


#민중시 #기린 울음 #고영서 #삶이보이는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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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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