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짝 내 딛을 때 마다 만년의 시간이 지나간다

[늘근백수의 객적은 길 떠나보기 3] 그랜드캐니언 트레킹

등록 2007.05.14 09:47수정 2007.05.1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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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yaki point 에서 바라보는 그랜드캐니언

yaki point 에서 바라보는 그랜드캐니언 ⓒ 제정길

그랜드캐니언 사우스 림에는 모두 5개의 트레킹 코스가 있다. 림 트레일(Rim Trail)이라 불리 우는 협곡 위 고원지대의 가상 자리를 걷는 코스가 하나 있고, 고원지대에서 협곡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오는 코스가 4개 있다. 협곡 아래로 갔다 오는 코스는 그 길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어느 것도 기저인 콜로라도 강까지 하루에 갔다 오기에는 무리라고 안내 책자에 쓰여 있다. 우리는 그 중 거리가 비교적 짧고 가장 경치가 좋다는 사우스 카이뱁 트레일(South Kaibab Trail) 코스로 가보기로 하였다.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서니 공기는 싸늘하고 반팔로 나선 몸은 으스스 떨리기까지 했다. 간밤의 최저 온도가 2도(C)였으니 그럴 만도 한 일이나, 협곡의 하단인 콜로라도 강 주변의 한 낮 온도는 40도를 넘는다는 일기예보니 차림을 그렇게 밖에 할 수가 없는 거였다.


셔틀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트레킹의 시발지인 야키 포인트(Yaki Point)에 도착하였다. 이곳의 고도는 2213m, 남한에서 가장 높다는 한라산 보다 200m 더 높은 고도에 위치하고 있다. 트레킹은 이 고도에서 콜로라도 강 쪽의 협곡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역 등산의 형태를 취하게 되어 있는 셈이다.

a 위에서 내려다 본 트레킹 코스, 길게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위에서 내려다 본 트레킹 코스, 길게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 제정길

트레일 헤드(Trail Head 출발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천길 단애를 이루었고, 그 사이로 길이 길게 꾸불거리며 똬리를 튼 뱀처럼 누워있었다. 어제 브라이트 에인젤 트레일 코스를 답사한바 있어 크게 위험한 것은 아니라는 확신은 생겼으나, 다시 길 앞에 서니 작은 설렘과 긴장감이 가슴에서 기어 나왔다. 시간은 이곳 시계로 오전9시 15분, 오늘은 5월의 첫날(한국은 5월 2일이겠지), 날씨는 잔뜩 흐리고 바람 간간히 불었다.

길은 시작부터 버석거렸다. 아래로 1m를 내려가기 위해선 옆으로 10m쯤 사행을 해야 했고, 바닥은 노새의 발굽에 시달려서인지 한 발짝 떼어놓을 때 마다 흙먼지가 푸석푸석 눈앞을 가렸다. 길의 폭은 예상외로 넓었다. 사람 둘이 여유 있게 교차할 수 있는 충분한 너비를 가졌고, 위험하다 싶은 데는 나무 등으로 계단을 만들어두어서 낙상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a 길위의 사람들

길위의 사람들 ⓒ 제정길

좌우 사방을 천천히 둘러보며 걸어 내려갔다. 사람들을 더러 만날 수 있었다. 각양각색의 피부 빛깔을 가진 인간들, 경쾌한 옷차림으로 밝은 미소를 띠며 교차하며 지나갔다. 보기에 좋았다. 그들은 이 대단한 협곡에 와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미미한 것인지를 이미 깨달아 버린 것일까. 그래서 마음을 반쯤은 비우니 절로 미소가 나는 것일까.

a 삶, 그 경건함

삶, 그 경건함 ⓒ 제정길

길은 생각보다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워낙 갈지 자로 되어있어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되어도 돌아보면 고도는 조금 밖에 줄어있지 않았다. 황색의 바위 사이로 이름 모르는 꽃 피어서 하늘거리고 길바닥에서는 붉디붉은 황토 흙이 바람에 폴폴 날리었다.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바람은 거세게 불었고, 내려다보면 아뜩한 천길 단애, 하늘은 찌푸렸다 개었다를 계속했다.

a 박제되어 두부처럼 짤린 시간들

박제되어 두부처럼 짤린 시간들 ⓒ 제정길

내려올수록 옆 협곡의 단애 지층이 뚜렷이 보였다. 명절날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있는 그것은 맨 위 지층이 2억70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 아래층은 2억7300만 년 전, 또 그 아래 지층은 2억7500만 년 전, 하단부에 기저 한 10번째 지층은 5억2500만 년 전에 형성된 것들이라 한다. 사행의 길을 따라 빙빙 돌아서 내려간다고 하나 한 발짝 내 딛을 때마나 만년의 시간들이 내 발 옆을 스쳐가는 것이었다.

a 시간의 호리병, 수 억년의 박제된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시간의 호리병, 수 억년의 박제된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 제정길

협곡은 마치 시간을 가두어 둔 기다란 유리 호로병 같았다. 수억 년의 시간들은 차례로 그 속에 갇히어 박제가 된 채 제사상의 시루떡이 되어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그 위에 부생하는 온갖 산 것들은 단지 자기에게 허여된 시간에 눌리어 그가 가진 시간의 의미를 헤아려 볼 힘조차 없었다. 하루살이에게 일년 후의 약속처럼 그것은 이해하기 힘든 크기였으리라.

다람쥐 한 마리 갑자기 나타나서 달아날 생각은 않고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봤다. 뭘 달라는 눈치였다. 그놈 참! 산 것들은 어디서나 비슷한지 관악산에서 만나는 그것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줄 것도 없거니와 야생동물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말라는 안내 책자 생각이 나서 못 본체 지나오는데 그 녀석 한참을 따라오다 슬그머니 사라졌다.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거다. '에이 쫀쫀한 녀석, 그 주제에 그랜드캐니언 트레킹이라니. 시간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고 온 것인가. 자기의 시간에 제 스스로 목을 맨 채 헛것에 매달려 허덕허덕 하는 처지에. 그냥 뒷산에 올라 도토리나 따다가 묵이나 해먹고 누웠지…'

오전 10시 20분경에 세다 리지(Cedar Ridge)에 도착하였다. 제법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고 화장실도 만들어져 있었다. 출발지로부터 왕복 5km, 표고 차는 347m인 지점이다. 콜로라도 강까지는 아직도 멀었고 어차피 당일에는 갔다 올 수도 없는 일, 이쯤에서 발길을 되돌리기로 했다.


a Cedar Ridge에서 내려다 보는 그랜드캐니언 협곡

Cedar Ridge에서 내려다 보는 그랜드캐니언 협곡 ⓒ 제정길

협곡의 채 반도 못 내려 온 거였지만 아래에서 보는 그랜드캐니언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쪽으로는 거대한 협곡이 무너질 것처럼 솟아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멀리 낭떠러지 너머로 계곡이 물 빠진 서해 바다처럼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그 계곡의 중심부로 콜로라도 강 흐르고 그 건너 부다 템플(Budha Temple) 봉우리가 우뚝하고, 또 아득히 그 너머로는 반대편 노스 림(North Rim)의 절벽이 꿈길인양 병풍 쳐 져 있었다.

a 나를 찍어봐 대신 모델료는 줘야돼

나를 찍어봐 대신 모델료는 줘야돼 ⓒ 제정길

날씨는 우려했던 것만큼 덥지는 않았다. 평평한 바위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며 산천경개를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다람쥐 또 나타나 어리석은 인간들을 놀리고 있었다. 돌아가야지 이것은 너희 땅이니 우리는 왔던 곳으로 흔적도 없이 되돌아가야지. 하늘 어두컴컴하였으나 비는 흘리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카메라를 가방에 넣어두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서 올라오는데 트레킹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에서 한 무리의 노새(Mule)꾼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길바닥에 흘린 똥으로만 그 존재를 알려왔던 것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다리 힘을 믿지 못하는 의심 많은 인간들을 태우고 인솔자의 인솔에 따라 단체로 트레킹(그렇게 불러도 되나)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a 노새를 타고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

노새를 타고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 ⓒ 제정길

중국의 관광지에는 가마꾼들이 지친 관광객을 실어 날라주며 돈을 받는데 이곳에서는 노새라? 혹시 인간의 인권 운운 하며 노새를 택했다면 잘못된 선택일 듯싶었다. 왜냐면 가마꾼들은 자신이 직접 수고의 대가를 받아 짭짤한 수입을 올리지만 노새는 죽도록 노동만 제공하고 한 푼의 팁도 제 앞으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어쨌거나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고 또 보기에는 그럴싸한 점도 있었다. 노새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a 비 내리는 그랜드캐니언

비 내리는 그랜드캐니언 ⓒ 제정길

트레일 헤드로 다시 돌아오니 낮12시가 넘었었다. 오두막으로 돌아와 점심 먹고 오후에 림 트레일에 나서는데 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그랜드캐니언을 망연히 보고 있다가 오두막으로 되돌아 왔다. 비 덕분에 공원 밖으로 차를 몰고 나가 애리조나 스테이크를 뜯었다. 와인과 함께. 비, 와인에 취해 비틀거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 평범한 '늘근백수'가 미국 등지를 떠돌며 보고 느낀 것을 기술해가는 여행기입니다. 여행은 4월 25일 시작되었고 향후 두어달간 또는 그 이상 계속될 것입니다. 글은 여행 당일 작성하고 있으나 기사 송고는 중간 거점인 새크라멘토에 돌아와서 하는 관계로 며칠씩 시차가 생깁니다. 글의 내용은 여행지에서 보게 되는 풍물 소개보다는 그런 것들을 보며 느끼는 '그의 생각' 위주로 쓰여질 것입니다. 

글은 연달아 이어진 관계로 가능하면 1회부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한 평범한 '늘근백수'가 미국 등지를 떠돌며 보고 느낀 것을 기술해가는 여행기입니다. 여행은 4월 25일 시작되었고 향후 두어달간 또는 그 이상 계속될 것입니다. 글은 여행 당일 작성하고 있으나 기사 송고는 중간 거점인 새크라멘토에 돌아와서 하는 관계로 며칠씩 시차가 생깁니다. 글의 내용은 여행지에서 보게 되는 풍물 소개보다는 그런 것들을 보며 느끼는 '그의 생각' 위주로 쓰여질 것입니다. 

글은 연달아 이어진 관계로 가능하면 1회부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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