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

[뉴욕리포트] 미국인들의 '의미 부여하기'에서 배운다

등록 2007.05.19 11:35수정 2007.05.1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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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패션거리의 '재봉틀 아저씨'.
뉴욕 패션거리의 '재봉틀 아저씨'.하승창
뉴욕 시내를 걷다 보면 서울보다도 오래 된 도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더 오래된 듯 한 느낌을 갖게 된다. 서울이 늦게 재개발된 탓도 있지만 도시가 지녀 온 역사를 그대로 살리고 상징화해 놓은 탓이다.

미국의 역사는 200년 갓 넘었다. 뉴욕 시내에서 아무리 오래 되었다고 해도 서울의 고궁들이 지닌 역사의 나이테를 감당할 수 있으랴 싶다. 하지만 묘하게도 오히려 뉴욕의 오래 된 공간에서 켜켜이 쌓인 듯한 냄새를 맡곤 한다. 아마도 우리네 역사적 공간은 자국만 남은 채 개발 광풍에 없어져 버렸거나, 박제화된 채 보존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지 모른다.

역사를 자기 주변에 두려는 사람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의 역사적 공간은 현재와 공존한다. 오래 된 성당 안에는 여전히 예배를 보는 사람들이 있고, 오래 된 극장안에서도 여전히 극이 올라가고 있다. 박제화된 보존 공간 속에서 역사의 냄새를 맡기란 어렵지만,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는 공간에 들어가면 과거의 향기가 그대로 녹아 있다.

여하간 이들은 거리 이름 하나에도 자신의 역사를 현재에 살리고 싶어한다. 할렘가로 들어서는 센트럴파크 북쪽 끝거리는 마틴루터킹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을 가지고 있다. 공항이름 하나에도 자신들이 기억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짓지 않는가? 케네디공항, 레이건공항…. 삶의 공간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것에 상징을 부여함으로써 역사를 자기 주변에 두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역사에만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다. 현재 삶의 모습도 상징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스트랜드 서점이 들어섰던 거리 이름이 북로우(book row)였던 것처럼 뉴욕의 거리엔 자신들의 삶의 모습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름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지금은 현재는 삶이지만 지나면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뉴욕 시내 7번가를 따라 걷다보면 40번가에서 재밌는 상징물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재봉틀 아저씨다. 얼마 전 뉴욕한인회 부회장을 지낸 박종진씨와의 점심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정했다. 박 부회장이 '재봉틀 아저씨' 앞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장소에서 난 그런 아저씨를 찾지 못해 헤맨적이 있다.

박 부회장을 만나고서야 재봉틀 아저씨가 거리의 상인이 아니라 동상이었음을 알았다. 몇 번 지나다니면서도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옆에는 단추 구멍에 끼워져 있는 바늘도 함께 볼 수 있다. 35번가부터 41번가에 이르는 이 거리가 패션가임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고개를 길 아래로 향하면 각종 의류브랜드가 새겨있는 거리를 만날 수 있다. 할리우드 거리에 영화인 이름이 각인된 것처럼.


재봉틀아저씨?

패션거리 모습.
패션거리 모습.하승창
1972년 이 거리를 패션가로 이름 지을 때 이들은 세계패션의 수도(the fashion capital of world)를 꿈꿨다. 이들의 꿈이 실현된 것인지는 몰라도 이름만으로도 패션의 명장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공간이 대부분 이 거리에 있다.


Kelvin Klein, Donna Karan…. 이런 유명한 사람들의 작업공간과 쇼룸이 이 거리의 빌딩 내에 산재해 있는 것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영화를 혹 보셨는가 모르겠다. 영화장면 곳곳에 7번가 배경이 곳곳에서 노출된다. 배우들이 간혹 의상을 들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거리에서도 왕왕 볼 수 있다. 옷감이나 막 디자인하고 있는듯 한 의류들을 가지고 이리 저리 다니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유명한 뉴스쿨의 파슨즈 디자인 학교의 건물 하나도 이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7번가에 있지는 않지만 자비스센터에서는 각종 패션 관련 이벤트들이 열려서 패션의 경향과 흐름을 볼 수 있게 한다. 그야말로 패션가인 셈이다.

이 거리의 이면에서 부지런히 먹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유명브랜드 의류를 저임노동력으로 만들어 공급하는 국가들로부터 이민 온 사람들이다. 이 거리의 한인들의 부침도 한국경제의 변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1972년 처음 패션가로 이름지을 때만 해도 이 곳에는 제조공장들이 청계천 봉제공장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고 한다. 70년대 한국이 저임노동력으로 섬유를 수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경쟁력을 잃은 제조공장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80년대 한국의 섬유수출회사들은 주재원들을 파견하거나 이들 중 일부가 아예 무역상을 차려서 직접 중개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디자인과 브랜드로 만들어진 한국의 싼 의류들이 수입되면서 이 거리에 한국 사람들도 적잖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90년대부터 중국의 저가 공세가 시작되고 한국의 공장들이 중국으로 옮기면서부터 한국의 무역상들도 중국과 미국 사이의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직접 거래가 비용을 훨씬 덜 들이고 이익을 남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중국인들이 가만있을 리 있겠는가? 지금 이 거리에 중국인 무역상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생산기지가 중국에 있기 때문이다.

뉴스쿨의 파슨즈 디자인 학교 전경.
뉴스쿨의 파슨즈 디자인 학교 전경.하승창
이 거리에 지난 10여년간 의류를 공급하고 있는 박종진씨는 "한국 사람들에게 좋은 시절은 다 갔다"고 말했다. 유태계 출신들의 사장들과 유명 디자이너들의 화려한 성공 뒤에서 그들의 하청으로 먹고 살았던 한국의 기업들이 이제 중국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거리는 1993년에 생긴 지역 상인연합회가 관리하고 있다. 이 지역에 들어서 있는 기업과 가게의 회비로 운영하는 이 연합회는 건물임대차에 대한 안내부터 거리 청소, 각종 이벤트까지 관리하고 있다.

제조공장은 한국과 중국으로 내주고 있지만 디자인과 브랜드로 더 많은 부가가치를 누리며 유럽과 함께 세계 의류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의류산업의 중심이 이 패션가인 셈이다. 그 패션가의 상징이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제조공장을 표현하는 것은 재봉틀 아저씨와 단추와 바늘인 것이다.

서울의 경우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숱하게 많은 공간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거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으며, 또 일상생활과 의미를 부여하는지 의문이다. 꼭 오래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도 미래에 기억되어야 할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해야하는 것이 아닌지….

지금 서울의 여러 모습을 하나의 풍물이자 상징적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이런 것들이 켜켜이 쌓아간다면 오랜 역사를 가진 서울의 모습도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어우러져 다른 도시들과 구별되는 나름의 독특한 풍치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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