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옥도' 경험한 한 독일병사의 고백

[서평] 잊혀진 병사-어느 독일병사의 2차대전 회고록

등록 2007.05.21 09:57수정 2007.05.2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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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우리에게는 가깝고도 먼 단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2030세대들에게 전쟁은 직접적으로 체험해보지 못한 먼 과거 혹은 타국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한편으로 전쟁이라는 단어가 주는 막연한 공포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도 느낄 수 있는 잠재적인 두려움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전쟁과 폭력을 두려워하면서도, 어쩌면 가장 둔감해져 있는 모순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라이언일병 구하기>가 보여주는 참혹한 전쟁의 실상에 차마 눈을 돌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영화가 보여주는 전쟁의 시각적 스펙터클에 열광하는 모순이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어떤 명분으로도 미화할 수 없는 전쟁의 가장 큰 추악함은, 그 필연적인 속성이 '이유 없는 폭력의 악순환'을 유발한다는데 있다. <잊혀진 병사- 어느 독일병사의 2차대전 회고록>(기 사예르 지음/루비박스)은 영상과 텍스트로 미화된 이미지나, 선과 악의 구분을 떠나, 한 인간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의 전쟁'을 설명해준다.

저자는 2차대전 당시 '악의 축'인 독일군 출신이지만, 글에서는 조국 독일에 대한 미화도 적국이었던 소련에 대한 증오도 거세된 채, 전쟁에 대한 차디찬 냉소와 건조함만이 느껴진다. 오히려 철없는 모험심과 애국심으로 10대의 어린 나이에 소년병으로 2차대전에 참전한 저자가 마주친 전쟁의 진정한 현실은, 숱한 죽음의 공포뿐이었다.

저자가 보여주는 전쟁은 현세의 '살아있는 지옥도' 그 자체다. 끝없는 굶주림과 약탈, 싸움이 거듭될수록 줄어드는 보급품과 식량 부족. 혹한의 추위와 싸우며 장거리행군을 하는데 발은 헐벗은 상태. 적과 싸우다 영웅스럽게 죽는 것도 아닌 아군의 손에 어처구니없이 죽는 병사들이 속출한다.

살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죽여야만 한다. 잠이 든 새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죽음과 굶주림의 공포 속에서 동료들의 손에 무참히 맞아죽기도 하고, 민간인과 포로를 학살하는 것도 예사다. 죄책감마저도 사치인 전장터에서 대의명분이나 개인의 존엄성 따위는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사지를 뚫고 살아 돌아온 병사들마저 절망으로 몰아넣은 조국의 선물은, 개인 보급품 분실과 군무지 탈영 등의 죄를 물어 군법재판에 회부하고 교수형에 처하는 잔혹함이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전쟁과 군의 속성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순간이다.

이들은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자 부모이며 친구였을 것이다. 이런 아비규환의 세계가 주는 비극은, 정작 그들은 왜 싸워야 하는지 죽어야 하는지 제대로 된 이유조차 없이 헛되이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점이다.

2차대전에서 무수히 학살당했던 수많은 민간인들이나 6.25전쟁에서 남과 북으로 갈려서 싸워야했던 동족들 가운데, 국익과 이념 같은 명분싸움을 이해하거나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불과 소수의 선택이지만, 궁극에는 수많은 이들이 타의에 의해 전쟁의 후폭풍에 지배당하고 만다.

최근 유행하는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전쟁영웅을 내세운 시대극들이, 전쟁과 폭력을 다루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보라. 피를 튀기며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져나가는 무수한 게임속 유닛들의 모습이나 일당백의 무용을 과시하는 화려한 전쟁영웅의 무용담을 보다보면, 어느새 전쟁의 잔혹성과 폭력마저 둔감하게 만드는 대중문화의 힘에 섬뜩함을 느낄 때도 있다.

게임속 유닛들은 마우스 한번만 클릭하면 죽음이 뻔한 사지 앞으로도 두려움 없이 전진한다. 영화와 드라마 속 병사들은 위대한 영웅의 무용담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애물이거나, 죽음도 불사하는 용맹무쌍한 존재들로만 그려지기 일쑤다.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타자의 입장에서, 게임과 영화 속 병사들은 하나의 인격체이기에 앞서서 '숫자'나 전쟁을 위한 '도구'같은 물리적인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진짜 전쟁은 게임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인간성이 무참히 갈라지는 참혹한 현장이다. 총알받이가 되어 사지로 끌려가는 말단 병사나 빗나간 테리리즘으로 무참하게 희생당하는 서민들의 입장에 되었을 때, 알량한 이념이나 감상주의적 무용담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우리에게도 6.25나 월남전같은 비극적인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세대들이 있다. 그러나 정말로 전쟁의 잔혹성을 진정 뼛속깊이 체험해본 사람들일수록, 무용담을 늘어놓듯 결코 전쟁을 그리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전쟁을 가까이서 보고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만이 전해줄 수 있는, '살아남은 이들의 뒤늦은 죄책감과 슬픔'인 것이다.

잊혀진 병사 - 어느 독일 병사의 2차 대전 회고록

기 사예르 지음, 서정태 엮음,
루비박스, 2007


#전쟁 #독일병사 #2차대전 #소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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