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내 손을 거치면 근사해진당게"

김갑희 할아버지의 예쁜 '노로(老路)공원'

등록 2007.05.28 17:17수정 2007.05.2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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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동네아이들을 위해 김갑희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노로공원'

동네아이들을 위해 김갑희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노로공원' ⓒ 정읍시민신문


완연한 여름 날씨를 보이던 지난 23일.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식히려 차창을 활짝 열고 시원한 바람이 전해오는 논과 밭과 산 내음을 맡으며 정읍시 이평면으로 향했다. 이평 면사무소를 끼고 경사진 길에 들어서자마자 먼발치에서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알록달록 튀어나온 앙증맞은 지붕들이 보였다. 규모는 비할 데가 못 되지만 여느 놀이동산과 다름없는 그곳은 77세 김갑희 할아버지가 손수 만든 '노로(老路) 공원'.

어른 키의 세 배는 족히 돼 보이는 높다란 출입문에서 연신 할아버지를 찾았다. 자식보다 소중한 공원 이곳저곳을 손보느라 미처 인기척을 듣지 못하고 느직하게 인사를 건네는 김갑희 할아버지.

"아이구 이거 죄송하구만요. 어여 들어오시쇼."

a 공원에 마련된 연못, 배와 다리까지 손수 제작했다.

공원에 마련된 연못, 배와 다리까지 손수 제작했다. ⓒ 정읍시민신문

마음씨 좋게 생긴 얼굴에 머금은 인자한 미소를 따라 김 할아버지의 회심의 작품들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우체통. 곳곳에 각기 다른 색깔로 칠해져 작은 동물들의 집으로, 휴지통으로, 물건 보관함으로 서 있다. 밥솥 뚜껑은 빨강, 노랑, 파랑, 초록색 옷으로 갈아입고 공원의 모든 문에 매달려 있다. 버려진 TV와 냉장고도 제 역할을 찾아 새 옷을 입고 근사하게 반겨준다.

"뭐든지 일단 세상에 생겨났으면 다 쓸모가 있는 법인디, 아 이렇게 멀쩡한 걸 기냥 막 갖다 버리는 것이 너무 아깝자녀요. 그리서 하나 둘 주워다 맹근 게 이렇게 제법 볼만하니 생겼자녀 안 그려?"

a 앙증맞은 미니 공연무대

앙증맞은 미니 공연무대 ⓒ 정읍시민신문

그저 작은 놀이터이겠거니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폐품들이 할아버지의 손을 거쳐 완성 된 작품들은 그 자체로 '전시회'에 온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그 규모도 제법 커서 공원 안에 커다란 연못이 있고 그 연못을 건너기 위한 10여 미터의 다리도 놓여있었다. 다리 왼편에 솟은 커다란 성 모양의 풍차에선 자전거 바퀴에 붙은 밥그릇들이 돌아가며 물줄기를 때려 장관을 연출했다. 할아버지는 서비스(?) 차원에서 신나는 음악까지 틀어줬다. 음악을 들으며 눈을 돌리니 아이들이 오면 탈 수 있도록 직접 만든 나무배가 동동 떠있었다.

"이 일을 91년부터 시작혔으니 벌써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요. 전기고 음향이고 죄다 혼자 작업한 겁니다. 어찌 생각하믄 제 수행이라고 할 수도 있겄네요. 허허."

할아버지의 작품 하나하나에 감탄을 연발하던 중 너무 깜찍해 걸음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게 있었다. 바로 마이크와 기타, 각종 소품들로 꾸며진 '미니 공연무대'

한 번은 한 아이가 무대에 있던 하모니카가 탐이 났던지 가지고 가버렸다. 얼마 되지 않는 것인데 그 아이의 인생에 상처 될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김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전화를 해서 "아무개야 하모니카를 어디다 두었냐, 의자 밑이더냐, 화분 옆이냐? 니가 한번 찾아봐라" 넌지시 이야기 했더니 "내일 가서 찾아 드릴게요" 하더니, 다음날 와서 슬그머니 놓고 가더란다.

"'아, 의자 밑에서 찾았다냐' 그러면 아이가 흐뭇하게 생각하고 다음에 또 놀러오더라고."

사실 무대보다는 그 앞에 관중석이랍시고 옹기종기 놓여있는 아기자기한 나무 의자들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너무 작고 앙증맞은 의자들에서 느껴지는 어린 시절 추억은 그 위에 앉아있는 김 할아버지의 순수함과 무척 닮아있었다.

힘들었던 과거를 잊게 해준 노로공원

"조물주가 저한티 만드는 소질을 준 것 같으요."

a 기타를 연주하는 할아버지

기타를 연주하는 할아버지 ⓒ 정읍시민신문

당시 '초등학교' 시절 때부터 천부적으로 모형 만드는데 소질을 보였다는 김 할아버지의 말이다. 할아버지는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이 기타를 직접 만들어내 주위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고.

대학에서 임학을 전공한 김 할아버지는 청년 시절 군에서 제대하고 하얀 옷을 걸친 의사라는 직업에 매료돼 병원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자격도 없고 '정말 의사였다면 좋았을 텐데'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했지만 평소 알고 지내던 원장을 도와 수년간 병원 일을 도우며 직접 40여명에 이르는 아이를 받기도 했다.


"예전 시골의원은 뭐 별걸 다 봤자녀요. 아 지금도 만나믄 친정식구마냥 다정허게 인사를 헌당게요."

그렇게 스스로 흥에 겨워 일하던 할아버지는 36세 되던 해 이평 우체국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우체국장 생활 10년쯤 접어들던 때 큰 사고가 나고 말았다. 어마어마한 액수에 달하는 통상환을 누군가 훔쳐간 것이다. 그로인해 부모님께 받은 밭과 땅을 모두 팔아 변상하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김 할아버지에겐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a 다리위에서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는 할아버지

다리위에서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는 할아버지 ⓒ 정읍시민신문

"염세적이라고 혀야 허나. 세상이 싫어지더랑게. 문 걸어 잠그고 죽으려고 혔어요. 그 때 안식구가 방문을 부수고 들어와 울며불며 애원하지 않았더라면 참말로 죽어 버렸겄지요."

그 일로 김 할아버지는 왼쪽 손이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힘도 잘 못 쓴다. 하지만 "그래도 이 손으로 놀이공원을 맹그렀다"며 자랑스럽게 손을 보여줬다.


지금껏 35년간 일기를 써오고 있다는 김 할아버지는 그 일로 15년간 간직해온 일기장을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래저래 잃은 것이 많지만 어쩌면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노로공원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성숙한 의식이 자리 잡았으면

사실 공원에 있는 동물들의 집이 많이 비어있었다. 어느 못된 사람들이 김 할아버지가 직접 사서 기르던 동물들과 한 TV프로그램에 소개 된 화면을 보고 전주에서 기증했던 원숭이 한 쌍을 훔쳐 가버린 것이다. "하도 도둑을 많이 맞아서 주위에 얼쩡거리는 사람만 있어도 경계를 하게 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안타까움이 일어났다.

"축산진흥센터에 버려진 동물들 있으믄 저한테 달라고 말해놨지라. 이왕 맹근 거 애기들이 와서 볼 것이라도 있게 뭔가 있어야 허지 않겄소. 아무튼 벼룩의 간을 빼먹제 누군지 정말 너무 허데요."

한 때 원숭이, 원앙, 칠면조 등 37종류의 동물들이 있었다는 공원은 몇 마리의 닭과 잉어들만이 지키고 있었다.

a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년같은 미소를 간직한 김갑희 할아버지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년같은 미소를 간직한 김갑희 할아버지 ⓒ 정읍시민신문

"저는 일부러 노인정에도 안가요. 한 번은 화투놀이를 하는 노인네들이 한 시간 동안 허는 욕을 시어봤더니 70번이 넘드라고. 그래서 '이러믄 쓰겄는가' 허고 타일렀더니 '듣기 싫으믄 자네가 안 나오믄 되겄네'라고 말허더랑게요."

김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워낙 남 말이라면 옳은 말도 받아들일 줄 모르니 실망이 컸다고 한다.

"'내가 그리했던가, 조금삼가야 쓰겄네' 라고 나와야 정답이 아니냐 이말이여."

할아버지는 "성숙하지 못한 요즘 사람들의 의식이 고쳐져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취재 전날 할아버지는 풍향기를 설치하기 위해 전봇대 높이의 구조물에 직접 올랐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은 기겁을 했지만 "나는 기계체조를 했던 몸이니 다들 걱정 말라"며 당당히 목적을 달성하고 내려왔다는 김 할아버지.

"살면서 재미진 것은 사람들마다 다 다르것죠. 근디 저는 이 놀이터보다 재미진 곳이 없어요. 근께 생전 딴디 여행도 안가제. 이것저것 내손으로 맹글고 아이들이 놀러오면 함께 놀고... 그 것이 내 재미여요. 근께 이름도 '노로'라고 붙였제. 늙어가면서 내 갈 길을 찾은 것이 이 '노로공원'이지라."

공원을 찾을 아이들을 위해 여기저기 딸기를 심어둔 김 할아버지의 아름다운 마음은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던 기자의 마음에 선선한 감동의 바람을 일으켰다. 사회에 찌들고 일상에 지친 사람이라면 한번쯤 노로공원을 찾아 김 할아버지의 조건 없는 사랑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북 정읍지역신문 '정읍시민신문'에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전북 정읍지역신문 '정읍시민신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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