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젊은 그들은 총탄에 쓰러졌다

'들불상' 시상식 5·18 묘역에서 거행... '윤상원상'에 이지경 포항지역 건설노조 전 위원장

등록 2007.05.29 15:07수정 2007.05.29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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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5·18 국립묘지 역사의 문앞에서 개최한 '들불 시상식'.

5·18 국립묘지 역사의 문앞에서 개최한 '들불 시상식'. ⓒ 조명자

5월 27일을 기억하는가? 27일은 광주민중항쟁의 투사들이 마지막 항전지 도청 안에서 계엄군의 총탄세례를 맞고 처참하게 스러진 날이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해방 광주의 10일동안 항쟁 지도부의 주역으로, 마지막 5월 무장항쟁을 이끈 '청년학생투쟁위원회'의 대변인으로 자신을 불살랐던 '윤상원' 그를 만나기 위해 '5·18 국립묘역'을 찾았다.

윤상원을 비롯한 '들불야학' 일곱 열사들의 합동 추모식과 그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들불상' 시상식이 열사들이 묻혀있는 5·18 묘역에서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윤상원상'을 받게 된 이는 이지경 포항지역 건설노조 전 위원장이다.

핍박받는 노동자를 위해 헌신하던 '들불야학'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였으니, 열악한 환경에 처한 건설 노동자를 위한 투쟁에 몸바치다 지금은 차가운 교도소에 갇혀 있는 이지경 전 위원장이야말로 이 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 아니겠는가.

a '들불 시상식'에 참석한 옛 동지들.

'들불 시상식'에 참석한 옛 동지들. ⓒ 조명자

a 감옥에 있는 포항지역 건설 노조 '이지경' 전 위원장을 대신해 상을 받는 부인.

감옥에 있는 포항지역 건설 노조 '이지경' 전 위원장을 대신해 상을 받는 부인. ⓒ 조명자

'들불야학'과 윤상원을 소개한다

여기서 '들불야학'과 윤상원을 소개해야겠다. 윤상원, 그는 광주 최초의 '위장 취업자'다. 1950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태어나 전남대 정외과를 졸업한 그는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부모님에겐 집안의 희망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주택은행 공채시험에 합격을 했던 윤상원, 남들 사는 것처럼 안정된 직장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신의 미래를 착실히 설계하는 범부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 좋은 직장을 몇 달 못 되어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1978년, 군사독재정권의 막바지 발악에 신음하는 선배·동료를 못 잊어서였고, 못 배우고 가난한 노동형제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어서였다.


'대졸' 학력을 숨기고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취업을 한 윤상원은 공장지대 근처에서 노동자를 위한 '들불야학'을 운영하는 대학 후배들의 권유로 야학 강사를 맡게 된다. 그리고 이 '들불야학'의 교사와 학생들은 이후 발생하는 5·18 민중항쟁의 최전선에서 투쟁했던 투사가 되었다.

영세 공장이 밀집되었던 광주 광천동 일대에서 야학과 신협 활동을 하던 윤상원. 노동자와 지식인을 잇는 다리가 되었던 그였기에 5월 18일 그 날, 전남대 정문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를 곤봉으로 무참하게 짓밟은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 이후 자연스레 발생한 저항운동에 주역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들불야학'의 젊은 그들은

1979년 10·26, 박정희가 죽고 나서도 우리가 염원하던 민주 세상은 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암울해져 서로 정권을 잡겠다고 앙앙대던 '3 김'을 비웃듯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만다.

1980년 서울의 봄, 5월 13일부터 15일까지 서울역 광장과 온 시가지를 하얗게 메우던 시민·학생 시위대의 기세는 금방이라도 신군부를 몰아내고 이 땅의 민주 정권을 창출할 것 같았다. 그러나 5월 15일, 학생운동 지도부는 서울역 광장을 메웠던 10만의 시위대를 향하여 해산결의를 통보하고 만다.

우리가 '서울역 회군'으로 기억하는 미완의 혁명은 이렇게 어이없이 끝이 났는데 광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의 주도로 도청 앞 광장에서 펼쳐지던 집회는 서울과 달리 16일까지 이어져 "전두환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도청 앞 광장을 달구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앞으로 매일 오전 10시에 각 대학 정문 앞에서 집회를 시작해서 정오엔 도청 앞으로 모두 모여 지속적인 투쟁을 벌여나가자는 마지막 결의를 하고 집회는 해산을 하게 된다.

시민들의 대저항에 위협을 느낀 신군부. 드디어 5월 17일 '계엄확대조치'를 단행하고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가게 된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7일 자정을 기해 발표한 '5·17 비상계엄 확대' 선포와 함께 예비검속으로 붙잡혀 간 사람들 소식을 윤상원이 들은 것은 18일 아침이었다. 사태추이를 살펴보자며 마지막 인사를 했던 박관현과의 만남이 영이별이 될 줄은, 광주에 몰아닥친 피바람이 그날 10시부터 몰아닥칠 줄은 그 때 윤상원은 알 수가 없었다.

광주민중항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약속대로 전남대 정문 앞에서 18일 오전 10시에 모인 학생들에게 계엄군의 무차별 공격이 시작됐다. 학생은 물론 교수까지 계엄군의 매질을 모면하지 못하는 참상을 보며 분노한 시위대가 늘어났다.

영문도 모르고 전대 정문 앞에 도착한 윤상원, 그는 200~300명의 시위대를 향해 곤봉과 군홧발로 무참히 짓이기는 계엄군의 만행에 전율을 느끼며 망연히 서 있었다고 한다.

광주역에서, 금남로에서 갈수록 불어나는 시위대가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을 18일 오후 1시쯤. 윤상원은 시위진압을 위해 공수부대가 투입됐다는 가공할 소식을 듣는다.

'화려한 휴가', 5·18 민중항쟁을 살육으로 진압한 계엄 공수부대의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였다. 시가지 곳곳의 누비며 참상을 목격했던 윤상원은 후배들과 힘을 합쳐 운동권 아지트였던 '녹두서점'에서 화염병 제작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 계엄군의 진압작전에 맞설 '시위 지도부'도 없는 상태였다. 막막한 상황 속에서 19일이 밝았다. 신문도 방송도, 18일의 만행을 보도하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무거운 적막감 속에 속속 모여들던 금남로의 시위대.

시가지 상황을 살펴보던 윤상원은 광천동 '들불야학' 공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미 야학 동료들이 야학운영에 관한 향후 대책을 논의하느라 모여 있었다. 그 동료들 앞에 윤상원이 포문을 열었다.

"시위를 주도할 지도부도, 만행을 보도해 줄 언론도 없이 무차별로 당하는 시민들을 위해 우리라도 나서야 한다. 이제부터 우리가 분노한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되어 투쟁에 나서자."

체포를 각오하고서라도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강변하던 윤상원. 불과 10일도 안 돼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시민들이 무자비한 군부독재의 제물이 될 줄은 윤상원은 그때까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광주항쟁 최초의 유인물 만든 윤상원

야학교재를 위해 준비된 등사기와 종이가 있었다. 유인물 초안은 윤상원이 작성하고 등사원지 필경은 글씨를 잘 쓰던 박용준이 맡았다. 19일 오후,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 이름으로 금남로에 뿌려진 이 호소문은 광주항쟁 최초의 유인물이었다.

박용준, 들불야학의 학생이면서 교사를 맡았던 청년이다. 갓 태어나 영아원에 들어온 고아로, 고아원에서 야간 실업고를 졸업하고 방통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할 정도로 착실한 청년이었다.

그런 청년이 신협 지도자 강습에서 만난 김영철(항쟁지도부 기획실장을 맡음, 투옥 중에 당한 고문으로 정신병을 얻어 투병하다 98년 영면)과의 인연으로 인생행로가 바뀌게 된다.

a 고아로 성장한 박용준 열사의 묘. 청순한 얼굴 사진이 눈물나게 한다.

고아로 성장한 박용준 열사의 묘. 청순한 얼굴 사진이 눈물나게 한다. ⓒ 조명자

박용준이 윤상원과 함께 마지막까지 투쟁현장을 사수하다 27일 새벽 4시쯤, YWCA 2층에서 무력 진압군의 총탄에 유명을 달했을 때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19일 내내, 계엄군들의 잔혹 행위가 시가지를 누볐다. 곤봉으로 때리고, 군홧발로 짓이기고, 팬티 바람으로 무릎 꿇리고. 심지어 여자들 속옷까지 찢어발기며 머리채를 휘어잡는 만행을 일삼았다. 분노한 시민과 대학생에 이어 고등학생까지 시위대에 합류했다.

20일, 공수부대의 만행은 계속되었다. 집집이 가택수색을 해 대학생과 젊은이를 연행해 가고, 백주대낮에 젊은 남녀를 잡아다가 속옷차림으로 꿇어 앉혀 기압을 주는 모습이 목격됐다. 금남로 가톨릭 센터 6층 주교관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조비오 신부는 "내 비록 성직자지만 지금 내게 총이 있다면 저 놈들을 모두 갈겨버리고 싶다"고 통한의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계엄군 몰아냈지만, 지도부는 무기를 회수하고

20일도 어김없이 '들불야학'팀의 손으로 만든 유인물이 살포됐다. 이번 유인물은 상황속보 대신 "유신 잔당과 살인마 전두환 쿠데타 세력은 물러가라"는 선언문 중심이었다. 아아, 그리고 이날 저녁 7시쯤. 해방 광주의 물꼬를 터준 '민주택시기사'들의 차량 시위가 시작된 날이었다.

200여 명의 택시기사들이 모여 항의 표시로 헤드라이트를 켜고 금남로를 향해 질주하던 광경은 공포에 젖은 광주시민들의 가슴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차량행렬을 따라 몽둥이와 각목을 든 시민들의 분노에 찬 함성에 대치하던 계엄군도 주춤했다.

곧이어 생사를 대신하는 혈전이 전개되었고 10일 항쟁에서 이 날의 피해가 제일 컸을 정도로 투쟁은 격렬했다. MBC가 불길에 휩싸였고 KBS, 세무서도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21일 새벽 3시쯤, 최루탄도 바닥난 계엄군이 마침내 물러가고 시가지는 시민들의 손에 장악되었다.

해방 광주에서 시위대는 계엄군과 맞설 무기를 확보하고,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금남로 일대에서 끊임없는 집회로 결속을 다졌지만 허술한 항쟁 지도부의 입장은 계속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무기회수를 주장하는 타협파와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지도부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오고 가는 사이 계엄군이 재진입하고 있다는 속보가 날아들었다. 바로 23일 오후 5시경이었다.

항쟁현장은 바로 비상 국면으로 전환이 돼 도청을 사수하는 시위대에게 총과 실탄이 지급됐다. 그러나 계엄군의 위력에 공포를 느낀 기존의 지도부는 계속 협상을 시도했고 아무 소득도 없이 무조건 무기회수에 들어가 풀린 총기의 50% 이상을 회수하고 말았다.

윤상원은 항쟁 10일 내내 그 자리에 있었다

내부 분열과 약화된 무장력. 시시각각 목을 죄어오는 공포를 온몸으로 느꼈던 광주 시민들에게 날아온 비보.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버스에 타고 있던 무고한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하였다는 소식과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 부녀자들까지 계엄군의 조준사격 희생자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피 말리는 전쟁터에서 자기 목숨 아깝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극심한 두려움에 항쟁터를 몰래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빠져나갔다고 남은 동지들이 도저히 안 잊혀 다시 되돌아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윤상원은 항쟁 10일 내내 그 자리에 있었다.

26일 오후, 계엄군의 최후통첩을 받은 시민군의 대열이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쟁종료만 주장하는 지도부에 맞서 새로 결성된 '청년학생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0여 명의 외신기자를 상대로 예정된 기자회견을 갖는다.

그 자리에 있었던 <볼티모어 선>지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윤상원의 기억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회견실 탁자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란 예감을 받았다. …그는 한국인으로 흔치않은 곱슬머리였다. 그의 행동에는 자신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무장 동료들의 허둥거림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침착함이 있었다.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도청에서, YMCA에서, YWCA에서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최후 결사 항쟁자가 속출했다. 그들에게 무기를 지급하면서 윤상원은 비장한 목소리로 마지막 연설을 한다.

"고등학생들은 나가라. 우리가 싸울 테니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들불야학의 어린 후배 나명관과 신병관. 야학 1기의 앳된 두 청년은 아직 스무 살도 안 되는 미성년자였다. 양동시장 좌판에서 생선장수를 하는 병관이 어머니, 노부모를 모시며 공장에 다니는 나명관. 이들이 과연 총을 들어야 하는 아이들인가? 윤상원의 가슴이 메어졌다.

"병관이와 명관이 너희들은 지금 당장 이 곳을 빠져나가라. …제발 집으로 돌아가거라."

윤상원의 애타는 설득에도 기어이 고개를 저었던 그들.

"형님, 우리도 싸울랍니다. 도청을 나가려면 형님하고 같이 나갈랍니다."

27일 새벽 4시 20분. 옆 자리에 있었던 동지, 이양현·김영철과 "저 세상 가서도 이렇게 동지애를 나누자"는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윤상원은 공수부대요원의 집중사격을 받고 쓰러진다. 외신기자 명함 10장이 바지 속에 있는 채로 불에 탄 시신이 '성명 불상자'로 처리된 채.

a 윤상원 열사의 묘, 윤상원 열사는 들불야학의 동료 박기순 열사와 1982년 영혼 결혼식을 함.

윤상원 열사의 묘, 윤상원 열사는 들불야학의 동료 박기순 열사와 1982년 영혼 결혼식을 함. ⓒ 조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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