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음식 그릇, 씻어서 내 놓는 남편

등록 2007.05.30 14:35수정 2007.05.3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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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이따금 아이들을 두고 점심, 저녁 두 끼의 식사를 책임못질 혼자만의 외출을 할 때면 남편은 항상 묻곤 한다.


"밥은 어떡하라고?"
"아빠가 끓여주는 라면이 맛있다잖아. 점심은 라면 끓여줘. 그리고 저녁은 대문에 붙어있는 전단지에서 아무 집에나 연락해 돈가스, 탕수육, 자장면, 통닭 중 저들이 좋아하는 것 시켜줘."

아이들에게는,
"엄마 좀 길게 갔다 올 테니까 배고프면 아빠에게 맛있는 것 사 달라고 해."
"아빠 안 사준다."
"아니다, 사준다고 약속했어."
"안 사주면?"
"그런 일 없으니까 걱정 말고 이 엄니 말을 믿으셔."

아무튼 그렇게 두 끼 식사에 대한 힌트를 주고 외출했다 돌아와 보면 대게 내가 읊어준 범위 안에서 끓여먹고 시켜먹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라면냄비는 씻어 엎고 배달음식 그릇은 배달원들이 일찍 수거해 버리기에 한 번도 시켜먹은 흔적을 구경한 적이 없었다.

그랬는데 며칠 전에는 처음으로 그 흔적을 보게 되었다. 그날은 휴일 오후라 배달원이 바빴는지 잊어버렸는지 밤 10시쯤 등산의 피로에 지쳐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 들어오는데 대문 앞에 하얀 그릇이 보였다. 그것은 저녁으로 시켜먹은 배달음식 그릇을 씻어서 내놓은 모습이었다.

남편이 씻어서 내놓은 배달 그릇
남편이 씻어서 내놓은 배달 그릇정명희
'아니, 이 양반이 그동안 내가 없을 때마다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계속 이렇게 씻어서 내 놓았다는 말씀?'


그 하얀 그릇들을 보자 그만 피로가 확 풀리는 듯했다. 결혼 초만 해도 배달음식 그릇을 씻어서 내 놓으면 '남들 하는 대로 그냥 살지, 뭐가 그렇게 잘났냐'며 퉁을 주었는데 함께 살다보니 남편은 저도 모르게 물이 들었나 보았다.

"아니, 그릇을 다 씻어서 내 놓았네! 그동안 쭉 그랬던 거야? 오늘 처음 봤네. 세상에나…."


나는 반색을 하며 남편에게 짝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내 아이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이다음에 커서 어디에 가서 살더라도 배달음식 그릇하나는 확실히 씻어서 내 놓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배달 그릇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은 그렇게 그릇을 깨끗이 해서 내 놓음으로서 여러 가지 '부수적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수적 효과라고 하니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함으로써 자라나는 아이들은 '배려'와 '감사'의 마음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배달 #그릇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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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순간 그 순간 어느 순간 혹은 매 순간 순간들....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 저서 <당신이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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