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말하는 '대학생 성문화'

"낯뜨거운 상아탑, 양성평등 수업 절실"

등록 2007.05.31 12:19수정 2007.05.3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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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희 기자] 신고식·MT·아르바이트 등 대학생들이 ‘성희롱’을 경험하는 공간은 생각보다 흔하다. MT만 해도 보통 남녀용으로 2개의 방을 잡지만 밤 늦게까지 술을 먹다보면 먼저 취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한 방에 모이고, 결국 남녀가 뒤섞여 자는 게 일반적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남자 동기와 팔베개를 하고 있더라'는 식이다.

"기분 나빠도 그냥 참아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MT에서 여학생들의 다리 사이를 찍은 동영상이 올라오기도 하고,성행위를 연상시키는 벌칙 게임은 이미 MT문화로 자리 잡힌 지 오래다.

이를 테면 남학생 무릎에 앉아 술을 먹게 하거나, 이성의 귀 등을 깨물게 하고, 입에서 입으로 술을 먹이며, 여학생을 눕혀놓고 그 위에서 남학생이 팔 굽혀펴기를 하는 식이다. 여학생의 눈을 가리고 남학생의 몸을 더듬어 동작을 그대로 따라하게 하는 벌칙도 놀이 중 하나일 뿐이다.

쪽지를 이용한 게임도 만만치 않다. 왕을 뽑은 사람이 숫자를 뽑은 사람에게 무엇이든 시킬 수 있는 '왕게임'에서는 "1번이 3번 가슴에 케첩을 뿌리고 5번이 핥아 먹어"라고 하는 식이다. 남녀가 마주보고 서로의 몸을 누르게 하는 전화기 게임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어떻게 이런 걸 할 수 있느냐'며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적은 없었다. 이유인 즉 "기분은 나쁘지만 정색을 하고 따지면 분위기도 이상해지고, 나중에 관계도 서먹해지니까 그냥 참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게임의 명분이 친목 도모와 분위기 띄우기이다보니 특히 저학년의 경우 "괜히 문제로 삼았다가 남은 학교생활이 힘들어지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하게 된다는 것.


현행법에 따르면 당사자가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는 모든 행위에 대해 성희롱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미경 수원지검 검사(여성가족부 파견검사)는 “정도에 따라 법적 처벌이 가능하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상대방의 언어·신체적 행위가 불쾌하게 느껴진다면 성희롱으로 봐야 한다”면서 “성적인 벌칙을 정하려 할 경우 당당하게 성희롱이라고 주장하고, 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만약 성희롱을 당한 이후라면 대학 내 성희롱·성폭력상담소를 찾아가 상담을 받는 것도 한 방법이다. 서울대의 경우 지난해 성희롱·성폭력상담소에 신청된 상담건수는 394건으로 2005년(282건)에 비해 40% 가까이 늘었다.

그러나 ‘성희롱’은 명백한 불법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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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신문 정대웅 기자

사실 성희롱을 해야겠다고 의도하고 저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이 성희롱인 줄 모르고 했다가 상대방이 굴욕감이나 수치심을 느껴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성희롱에 대한 남녀의 판단 기준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지난 2월 하혜석 서울대 성희롱·성폭력상담소 전문위원이 발표한 ‘남녀 대학생의 성희롱 인식 차이 분석을 통한 효과적 상담방안 연구’ 논문에 따르면, 여학생은 언어 성희롱에 더 수치심을 느끼는 반면, 남학생은 스킨십이 없으면 성희롱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방담에 참여한 남녀 대학생 5명에게 스킨십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자 여전히 차이를 보였다.

'어깨를 두드리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성희롱으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남학생은 "서로 믿음과 신뢰가 있는 사이라면 이 정도의 스킨십은 문제가 없다"고 답한 반면, 여학생은 "상대가 거부하지 않았다고 해서 성희롱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유재균씨는 "직장에 다니는 선배 얘기가 여성 뒤에만 서 있어도 성희롱 혐의를 받는다고 하더라"면서 "사실 어디까지가 성희롱이고 아닌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박정미씨는 "성매매방지법이 '성구매자는 범죄자'라는 기준을 만든 것처럼 성희롱도 구체적인 판단기준을 법으로 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양성평등 대학' 에티켓 만들자

대학 내에서 성희롱 문화를 없애기 위해서는 신입생 때부터 양성평등 의식을 갖는 것이 상식이며 '에티켓'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유재균씨는 "양성평등을 다룬 수업을 필수과목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학기에 '성과 문화'라는 교양수업을 들었는데,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한 인지능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는 것.

박정미씨는 "수업 한두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입생 때부터 ‘성인지 의식’을 대학생활의 에티켓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신입생 교육 때 한두시간 정도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관련 리포트를 과제로 제출케 하는 게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현재 연세대에서 '성과 인간관계' 강의를 맡고 있는 변혜정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소 연구교수도 "물론 대학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가해의 가능성이 높은 남성에게는 성희롱 감수성을 키워주고, 여성에게는 당당하게 '노'라고 얘기할 수 있는 자신감을 길러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홍세욱씨는 "친구와 우연히 학내 성폭력상담소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남성 상담원 데려올게요’라고 하더라. 남성 상담원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박정미씨는 "여성 위주에서 벗어나 ‘양성평등센터’ 등의 명칭을 사용해 남녀가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면서 "우리 학교의 경우 센터에서 ‘양성평등’을 주제로 UCC 공모전을 했는데, 남학생 참여율이 의외로 높아 홍보효과를 톡톡히 누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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