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전환? 희망 버려야 마음 편해요"

한달 앞둔 비정규직법 시행, 쫓겨난 젊은이들을 만나다

등록 2007.05.31 22:08수정 2007.06.0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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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해 11월 3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보호법, 파견근로자보호법, 노동위원회법 등 비정규직 관련 3법이 직권상정돼 처리됐다.

지난해 11월 3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보호법, 파견근로자보호법, 노동위원회법 등 비정규직 관련 3법이 직권상정돼 처리됐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비정규직'. 국립국어원 표준국어 대사전에서조차 검색되지 않는 단어다. 정체성도 불명확한 이 단어는 자주 뉴스에 등장하고 있다. 의미의 정체성은 없지만, 실체는 명확하고 또렷하게 존재한다. 우리 삶의 곳곳에 비정규직을 목격하고 경험할 수 있다. 비정규직 딱지를 붙이고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

"한 번도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계약 만료일이 가까울 때까지 별 말이 없었고, 저희 말고 다른 직원들도 다들 우리의 정규직 전환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엊그제 갑자기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어서…."

지난 25일 저녁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서 만난 김아무개(24)씨와 이아무개(24)씨는 목이 메인 듯 끝내 밥 한 공기를 다 비우지 못했다.

두 사람이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곳은 국내 모 대기업 총무팀. 2005년 입사 당시 2년 계약직이었지만, 계약이 끝난 후에는 정직원으로 전환해준다는 구두약속을 들었다. 입사 당시회사 내부의 인적성 검사와 시험도 통과했다.

"그냥 너무 황당해서 눈물밖에 안 나와요. 일하면서 크게 실수한 적도 없었는데…."

이씨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옆에 앉은 김씨는 "당장 내일부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며 "아직 부모님이랑 친구들에게는 말도 하지 못했다"고 고개를 떨궜다.

회사는 이들에게 다른 일을 구하거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씨가 말을 이어갔다.

"비정규직법인지, 뭔지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 문제가 우리들의 정규직 전환에 영향을 준 건 아닐까 생각해요".


김씨는 지인으로부터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김씨에게는 회사를 상대로 싸울 여력도 남아있지 않다. 김씨는 "큰 회사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 두렵다"며 "복직될 거라는 희망은 갖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체념했다.

두 사람이 빠진 자리의 업무는 고스란히 다른 직원에게 넘어갔다. 졸지에 세 사람 몫의 일을 하게 된 같은 팀 직원 이아무개(25)씨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


"충원이 될지, 안 될지도 불투명해요. 그래도 힘들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잘린 사람도 있는데, 일하고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라는 분위기가 숨 막힙니다".

"40살 행정보조원, 어쩌면 내 미래일지도 모르니까…."

a 정부 정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사진은 직장인들이 몰려있는 여의도 증권가.

정부 정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사진은 직장인들이 몰려있는 여의도 증권가. ⓒ 오마이뉴스 김영균

지난 24일 서울 홍익대 근처 카페에서 만난 조아무개(29)씨는 서울시의 한 공공기관에서 3년 가까이 행정보조로 근무하는 중이다. 역시 비정규직인 조씨는 대화 도중 '정규직 전환 가능성' 이야기가 나오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욕심이나 희망을 갖지 않으면 편해요.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안하니까요. 무기계약전환이나 비정규직이나 똑같은 것 같아요. 신경 안 써요. 별로 달라질 건 없을걸요".

조씨는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영업관리팀에서 1년 정도 근무했다. 대학원에 진학해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근무 여건상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퇴사라는 어려운 결심을 내렸다.

"그때는 자신 있었어요. 교육대학원을 졸업해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도 있었구요."

학비를 보태기 위해 시작한 일이 바로 행정보조 업무였다. 하지만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좁은 임용고시를 통과하기 어려웠다. 바쁜 업무 탓에 공부할 틈을 내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생활인으로서 스스로를 책임져야 할 나이가 됐다. 일을 쉽게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조씨에게 지금 업무는 크게 어렵지 않지만 불안정한 신분은 여전히 발목을 잡는다.

"근무시간도 정확하고, 근로조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요. 언제든 일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넘쳐나니까 당연하겠죠. 문서정리, 민원상담 외에 보통 결재라인 직전까지 서류를 정리하고 만들어서 주는데 결재는 담당 공무원 이름으로 맡고…. 그럴 때는 조금 허탈하기도 하죠. 이러려고 대학원까지 공부한 건 아니었는데 하는 후회도 있구요".

무엇보다 조씨를 힘들게 하는 것은 자존심이었다.

"사무실 안에서 힘든 건 그냥저냥 참을 수 있는데, 민원상담 할 때 이름이랑 직책을 물어보면 굉장히 곤혹스러워요. 보통 민원상담 할 때는 정확한 상담을 위해 신상정보를 많이 물어보게 되는데 행정보조라고 하면 잘 신뢰하지 않아요. 그럴 때면 괜히 민원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제 업무능력이 무시 받는 것 같아서 자존심도 상하고 그렇죠."

조씨가 근무하는 사무실에서는 최근 새로운 일용직을 채용했다.

"최근에 공공기관 비정규직 인원조사를 한다고 해서 서로 눈치를 많이 봤어요. 누구도 나가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제가 그만두겠다고 말했어요. 그 분은 나이가 40살인데 거의 10년 가까이 공공기관에서 행정보조업무를 담당해 오셨던 분이세요.

저는 아직 공무원시험이든 임용고사든 준비할 수 있는 나이지만, 그분은 그만두게 되면 갈 곳이 없어요. 딱히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땅한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일을 못 그만두게 되다보니 나이가 차고 어느덧 갈 곳이 없어지게 된 거죠. 처음엔 왜 저 나이에 아직도 보조 업무를 하고 있나, 의아했는데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그분의 모습이 내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르니까…."

무기계약직 전환 논의, 근본적 해결 방안 아니다

a 지난해 9월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국회 토론회에 참석하려는 KTX여승무원들을 국회 사무처와 경찰이 가로막아, 여승무원들이 국회 정문을 가로막고 출입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9월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국회 토론회에 참석하려는 KTX여승무원들을 국회 사무처와 경찰이 가로막아, 여승무원들이 국회 정문을 가로막고 출입을 요구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현재 정부는 조씨와 같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을 논의하고 있다. 무기계약직은 공무원은 아니지만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정년이 보장된 직접고용 근로자를 말한다. 공무원 신분은 아니지만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노동계는 무기계약직이 눈가리고 아웅하는 수단이라고 보고 있다.

이두현 사무금융연맹 부장은 5월 11일자 <시민의신문> 기고글에서 "1년마다 계약 갱신을 하게하고 임금도 비정규직 수준인 무기계약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라며 "차라리 비정규직을 영원히 비정규직으로 묶어두는 무기수계약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규직(무기계약) 전환자의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현실이다. 서울시청 조직담당관에서 비정규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최순임씨는 "'비정규직'이란 용어는 개념상 우리 서울시 같은 조직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 된다"며 "공무원 이외의 인력이 담당하는 일은 대부분 일시적인 업무 또는 행사 등을 위해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인력이거나 정부의 복지실업대책에 의한 일자리"라고 말했다.

최씨는 또 "요즘 사회양극화 현상, 근로자의 고용불안 등의 문제해결을 위해 접근하기에는 민간부문과 상황이 다르다"고 설명했지만 정확한 통계를 밝히기 꺼렸다. 정부 정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모순투성이 '비정규직 보호법'은 오는 7월 1일부터 시행된다. 얼마 전 영화감독 박찬욱씨는 한 영화제에 참석해 "희망으로 사람을 속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이 한번쯤 가슴이 담아야 할 말이다. 허점 많은 법안을 통과시켜놓고 비정규직을 위해 뭔가를 했다고 자위할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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