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06회

등록 2007.06.01 08:29수정 2007.06.01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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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감은 잠시 생각하는 척 하더니 시선을 용추에게로 돌렸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승낙이었다. 마음속에 다른 생각을 품고 일시적으로 협력하는 관계가 된 것이다. 용추는 추태감과 상만천에 대해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역시 거물들이다.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절대 경거망동이나 충동적인 결정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의 그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운중선의 확보가 우선입니다. 이 안의 상황은 언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마지막 퇴로는 확보해 놓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선수를 치는 겁니다. 실제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만든 인물이 누군지 몰라도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겁니다."

용추의 이 생각은 삼재의 생각과 일치했다. 하지만 삼재는 성급히 움직이는 바람에 실패했고,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


"대상은…?"

"태감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말과 함께 용추는 품속에서 돌돌 말은 한지를 꺼내들고는 추태감에게 내밀었다. 추태감의 표정에 언뜻 의외라는 기색이 스쳤다. 이미 대화가 여기까지 흐를 것이라 예상하고 미리 준비해 왔다는 점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한지를 풀어내자 붉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먹으로 쓴 것이 아닌 붉디붉은 주사(蛛絲)로 쓴 것이라 그런지 섬뜩했다. 이것은 살생부(殺生符)다.

"자네는 보기보다 모진 데가 있는 사람이군."

추태감은 쭉 훑고는 용추에게 말을 던졌다. 죽여야 할 인물들이 빼곡하다. 운중보 대부분의 인물들이 적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추태감은 모두 읽은 듯 천과(天荂)에게 살생부를 넘겼다. 천과는 받자마자 살생부를 길게 펼친 채 나머지 두 사람과 함께 훑기 시작했다.

"옥기룡보다는 그 두 놈이 먼저일 듯 싶습니다."

옥기룡 역시 살생부에 기재되어 있었던가? 하기야 일접사충 중 복을 죽인 자가 옥기룡임을 알았으니 상만천의 입장에서는 그를 가만둘 리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처리하면 될 것이오."

추태감이 뭐라 하기 전에 용추가 먼저 말했다.

"동시에…?"

"어차피 현무각을 그냥 둘 수는 없소. 그렇다고 그 안의 인물들을 한명씩 처리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오. 또한 철기문에서는 그 두 사람을 살려두려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럼 철기문을 시켜 현무각을…?"

"철기문만 가지고는 안 되오. 여기 그리고 우리 쪽 고수 대부분이 투입되어야 하오."

아예 운중보 전체를 휩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미 벌어진 상황을 보면 이것이 해결책이다. 그들이 적이든 아니든 상관할 필요가 없다. 적이라면 당연히 죽을 이유가 있는 것이고, 적이 아니라면 그냥 재수가 없어 죽는 것뿐이다.

"그쪽의 전력은 중원사괴 중 들어 온 세 명만으로도 막강하오. 더구나 두 명은 철기문의 단혁과 두 장로마저 죽일 능력이 있소. 함곡의 동생 선화란 여자도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오."

"철기문을 앞세워 타격을 주고 그 다음에 쉽게 처리하자는 말씀이구려. 헌데 용추께서는 아직 모르시는 사실이 있구려."

"무슨 사실 말이오?"

"중원사괴 네 명이 모두 들어와 있소. 생사판 종문천까지 이곳에 합류해 있다는 말이오. 어제 손번(巽幡)이 확인한 일이오."

"생사판 종문천까지…? 그가 언제 들어왔던 것일까? 어제까지 보지 못했는데…."

잠시 중얼거리던 용추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어제라면… 어제 운중선을 타고 들어왔다면 어쩌면… 용추의 시선이 상만천을 향했다. 상만천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용추를 바라보고 있었다. 암묵적인 시선이 서로 엉키고 그들은 똑같이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운중선에서 함곡의 처를 빼내간 자는 바로 그 놈이었다!'

허나 그들은 더 이상 내색하지 않았다. 함곡은 이미 자신들이 처를 납치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것이 밝혀질 것이 마음에 걸려 이미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 터였다. 마음속은 더욱 무거워졌지만 용추는 그 생각을 털어버리고 입을 열었다.

"하여간 그 보다 우선은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먼저 처리할 일이 있소."

이미 천과도 생각하고 있었던 터.

"운중선…!"

손발이 맞는다. 한마디 하면 그만이다. 부언할 필요가 없다. 목적은 달라도 지금 상황을 타결해 나갈 방도는 다르지 않다. 천과의 말에 용추는 또 다시 고개를 끄떡였다. 삼재의 진실한 능력에 대해서는 용추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추태감에게 있는 세 개의 두뇌라 했지만 그들의 무위 역시 팔번을 능가한다는 말이 있었다. 추태감과 상만천도 끼어들 생각을 하지 않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

"그렇소. 어쩌면 함곡 일행을 공격하는 것보다 운중선을 확보하는 일이 더 어려울 수도 있소."

추태감과 상만천은 가진 자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최악의 경우에라도 무사히 이곳을 나가는 문제다. 일단 퇴로만큼은 확보해야 한다.

"방법은…?"

"아직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고 있소. 부교를 내리지 않는 한 유일한 길은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것뿐이오. 물 속으로 접근하는 것은 지금으로 봐서는 불가능하오. 어제 물 속으로 스며들려던 이충이 모두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당했소. 수공(水攻)의 고수가 없는 한 평생 물길을 타고 산 위일천의 수하들을 상대하기 어렵소."

"수공이라면 우리에게 감번(坎幡)이 있소."

팔괘 중 감(坎)은 물(水)을 의미한다. 감번이라면 수공에 뛰어난 고수일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수공의 고수라 하더라도 한 명으로는 벅찰 것이오. 위일천의 수하 중 물 속을 지키는 자들은 거의 이십여 명이 넘을 것이오."

아무리 고수라 해도 물 밖과는 달리 물 속에서 한 명이 수십 명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속에서는 아무래도 움직임이 느려지기 때문에 고수라 해도 제대로 수공을 익힌 네 명 이상을 상대하기 어렵다.

"정면으로 공격해."

지켜보던 추태감이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일까? 추태감은 어제 흑백쌍용이 운중선에 뛰어 오르다 곤욕을 치른 사실을 몰라서 저러는 것이다. 우박같이 쏟아지는 화살세례를 어찌 피하려 하는가?

"그건 더욱…."

용추가 불가능함을 말하고자 입을 여는 순간 추태감이 재차 말했다.

"이곳에 와 있는 육파의 인물들이라면 방패막이 정도는 되겠지."

무서운 발상이었다. 육파의 인물들, 더구나 장문인까지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기껏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생각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느 누구를 희생시켜도 좋다는 잔인한 생각임에 틀림없었다. 허나 그 점에 있어서는 상만천이나 용추 역시 반박할 마음은 없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식사를 마치고 서로 상의해 결정하도록… 단 손을 잡기로 했으면 그 순간만큼은 서로의 마음을 열어야 해. 일의 순서도 중요하고…."

역시 추태감이었다. 비록 환관이라지만 아랫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다. 구체적인 것은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훌륭한 우두머리란 중요한 방향을 설정해 주는 것이지 세세한 것까지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추태감의 말뜻을 알아들은 용추와 삼재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이 입에 들어갈 상황이 아니다. 네 사람은 추태감과 상만천에게 가볍게 목례를 보내고는 그 방을 빠져나갔다. 이 시대 최고 두뇌를 가졌다는 네 명이 모여 계획을 짤 것이다. 아마 경천동지할 계획이 쏟아져 나올 터였다. 추태감이나 상만천은 그들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그렇고… 중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같이 식사하자고 했더니…."

추태감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를 발했다. 중의는 추태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천지 #추태감 #운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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