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 아빠를 보자 가슴이 막 뛰는 거야"

공연 관람 중에 만난 노란모자 할머니

등록 2007.06.01 13:36수정 2007.06.01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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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울놀이마당 공연장은 일요일만 되면 언제나 만석입니다. 무대 정 중앙과 마주 보이는 자리는 제일 먼저 만석이 되고는 합니다. 오늘 역시 일요일이라 만석입니다. 그래도 혹시 빈 좌석이 있나 하고 내려다보는데 문득 아주 반갑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서울 할머니, 여기요 여기!"


아래, 맨 앞 줄에서 노란모자를 쓴 할머니가 팔을 흔들고 있습니다. 난감합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관람 중에 자꾸 말을 걸어오기 때문입니다.

어제 처음 만난 할머니입니다. 나란히 앉게 되어 알게 되었는데 귀찮을 정도로 공연 관람 중에 자꾸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 살아요?"
"이 근처 살아요."

"서울 할머니시네. 이 근처 살면 가까워서 좋겄네. 슬슬 소풍삼아 걸어오구. 난 방이동 사는 딸집에 왔다가 왔는데. 집은 남양주서도 저 끝참이구."
"멀리서 오셨네요."
"어제 오늘 이틀간 안 봤는데두 고 텃밭 것들이 눈에 아물거려서 원."

젊은 사람들과 달리 할머니끼리는 이내 격의 없이 친숙해집니다. 살아온 세월이 비슷한 동시대인이라 눈빛도 마음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송파산대놀이 공연이 시작 되었는데도 눈치 없이 자꾸 물어 왔습니다. 매 번 오냐, 왜 혼자 왔느냐, 남편은 뭐 하느냐, 자식은 몇이냐, 아들은 뭐 하느냐, 왜 머리 염색은 안 했느냐 염색을 하면 십 년은 더 젊어 보일텐데.


나보다 나이가 십 년은 더 되어 보이는 어르신이라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벌떡 일어나 딴 자리를 찾아 가기도 무엇하고 해서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a 흥겨운 원주매지농악의 한 장면

흥겨운 원주매지농악의 한 장면 ⓒ 김 관 숙

원주매지농악이 한창일 때는 '얼쑤 얼쑤' 하고 어깨를 들썩이다가 내 한 손을 끌어잡고 장단에 맞춰 흔들기까지 하였습니다. 나는 그러는 게 싫었지만 내색도 못했습니다. 관중들이 모두 하나같이 손뼉장단을 치고 있습니다. 나도 그 뜨거운 분위기에 쓸려서 내 속에서 나오는 흥대로 손뼉장단을 맘껏 치며 한바탕 즐기고 싶습니다. 그런데 내 손을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서울놀이마당 공연을 보러 오는 것은 전통문화예술에 깊은 지식이나 상식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냥 우리 소리가 듣기 좋아서, 민속춤이 우아하고 좋아 보여서 서울놀이마당 공연을 보러 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안데스 민속음악이며 박력 넘치는 힙합, 팝핑, 락킹 같은 것도 보게 되었고 또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별 일이 없으면 공연이 있는 토요일, 일요일 오후가 되면 집을 나설 채비를 합니다.

a 안데스 민속 음악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안데스 민속 음악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 김관숙

놀이한마당을 구경하다 보면 가락과 장단이, 흥과 멋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흠뻑 적셔 놓습니다. 그럴 때의 그 기분은 아무도 모릅니다.

"아, 내가 잡아놨다구, 얼른 오라구!"

할 수 없이 나는 통로를 내려 갔습니다. 노란모자 할머니는 옆 좌석에 놓인 손가방을 집어 무릎에 놓았고 나는 거기 앉았습니다. 내가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려는데 "일찌거니 와야 명당 자릴 잡지, 댐부턴 일찌거니 와"라고 합니다.

노란모자 할머니 발 앞에 작은 색이 놓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게 뭐냐고 묻지 않습니다.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입니다. 말이 길어지면 어제처럼 또 공연 보기에 집중을 못할 것 같은 것입니다.

a 신나는 '그녀들의 소리 질주'의 멋있는 한 순간

신나는 '그녀들의 소리 질주'의 멋있는 한 순간 ⓒ 김관숙

큰북, 작은북, 꽹과리, 징, 장구 등의 소리가 어우러진 신명나는 '그녀들의 소리 질주' 가 한창일 때 노란모자 할머니가 나를 돌아보고 말했습니다.

"공연 보다가 난 집에 갈 거라구."
"아, 네에."

그러니까 발 앞에 작은 색이 집에 가려고 딸 집에서 챙겨가지고 나온 짐인가 봅니다. 색이 터질 듯이 볼록합니다. 딸이 효녀라는 생각이 듭니다.

a 최진숙 명창의 아리랑연곡이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최진숙 명창의 아리랑연곡이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 김관숙

날아갈 듯이 화사한 한복을 입은 명창이 무대에 나와 아리랑 연곡을 부릅니다. 명창의 애절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소리가 최신식 음향시설을 타고 넓디 넓은 상설공연장을 휘돌아 칩니다.

서민의 애환과 숨결이 어린 아리랑 연곡은 언제 어디서 들어도 가슴을 파고 들어와 감성을 자극합니다. 내 무딜 대로 무디어진 가슴을 순식간에 흔들어 놓습니다.

내 아득한 옛날이 흑백 사진처럼 떠오릅니다. 청순했던 양 갈래 머리 시절에 첫사랑도 떠오르고, 신새벽을 달리는 전차 소리도, 지게를 지고 골목을 누비는 두부장사 새우젓장사 소리도 들려옵니다. 모두 그립고, 보고 싶고, 일면 가슴이 아파지기도 합니다.

"스물 셋 적에 엄마랑 장을 봐가지고 미루나무 길을 가다가 막걸리 주전자를 힘겹게 들고 오는 여섯 살짜리 계집앨 만났지. 꼬질거리는 얼굴이랑 난닝구랑, 모양새가 하도 불쌍해 그 막걸리 주전자를 들어주면서 '너 엄마 없니?' 하구 물었더니 죽었대 글쎄."

그만 나는 눈이 시어졌습니다. 돌아보니 노란모자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덤덤한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의 말을 하듯이 이어 말 했습니다.

"근데 풋고추들이 주렁거리는 밭에서 나온 너덜대는 밀짚모자를 삐뚜룸허니 쓴 건장한 그 애 아빠를 보자 가슴이 막 뛰는 거야. 결혼을 하구 아들을 낳구, 참 행복했는데, 근데 짧았다구. 그 사람이 사고루 죽었지 뭐야. 그 딸이 중학교 일 학년 때."

굽이굽이 휘돌아 치는 아리랑 연곡이 노란모자 할머니의 옛날을 왈칵 쏟아놓게 했습니다. 그 너덜대는 밀짚모자를 삐뚜룸허니 쓴 첫사랑을 불러내어 준 것입니다.

나는 가만히 노란모자 할머니의 손을 잡았습니다. 뻣뻣합니다. 마른 나뭇가지 같습니다. 그러나 따듯합니다. 아마 내 손도 따듯할 것입니다.

"생각이 날 땐 그 사람이 잘 먹던 걸 해 가지구 그 딸을 보러 온다구. 공불 많이 시켜선지 걘 엄청 잘 살아."
"뭘 해 가지구 오셨는데요?"
"이번엔 쑥개떡을 했지. 요즘 쑥이 논둑에 한창이거든. 논물 보구 들어올 땐 쑥을 한 줌씩 뜯어가지구 들어오군 했었는데."

나는 가슴이 미여집니다. 그런데 노란모자 할머니는 꿈에서 깨어나듯이 팔목시계를 보더니 '어구, 벌써 이렇게 됐네'하면서 손가방을 가슴을 질러 메고 발 앞에 색을 집어들고 일어납니다. '언제 또 볼지는 모르지만 또 여기 온다면 요쯤에 앉아 있을 거야'라고 하면서.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아리랑 연곡에 어려 있는 깊은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제대로 감상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것도 내 나름대로 말입니다.

공연장을 나가 부지런히 뜰을 걸어 나가는 구부정한 노란모자 할머니의 뒷모습이 바로 아리랑, 아리랑 선율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또 여기서 만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는 내 모습도 어쩌면 작은 소리의 아리랑 선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놀이마당 #농악 #민속춤 #명창 #아리랑 연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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