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끄트머리에서 고운사 이야기부터 들려드린다고 했는데, 잠깐 뒤로 미루려고 합니다. 오늘은 얼마 앞서 어머님 품으로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님댁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지난 5월 26일, '고운사' 절을 둘러보고 국도 쪽으로 나오니, '일직'(경북 안동시)으로 가는 알림표가 보여요.
"일직이라고? 가만 일직이면 권 선생님댁이 아냐?"
뜻밖에 낯익은 마을 이름이라 눈이 번쩍 띄었어요.
"어, 그러네. 권 선생님댁이 '일직면 조탑리'라고 하지 않았나?"
반가운 마음에 무척 기뻤어요.
"먼저 누구한테라도 길을 묻자. 하긴 여기가 거의 의성 끝이니까 이 다음이 안동이란 말이야."
마침 길가에 작은 가게가 있어 다짜고짜 들어가서 길을 물었어요.
"아저씨! 여기 일직이 안동에 있는 일직이 맞나요?""네. 맞니더.""그럼 조탑리라고 아세요?""아, 조탑리요. 그럼요 여서 조금만 가면 되니더. 남안동IC 가는 길 아래 굴다리를 빠져나가면 바로 거가 조탑리니더."
말투도 정겨운 아저씨가 이어서 들려준 이야기는 퍽 따뜻했어요.
"며칠 전에 그 조탑리에 사는 창작동환가 그거 쓰는 분이 돌아가셨니더. 거서 장례도 크게 치렀는데…."
"아, 맞아요. 저희가 바로 그 댁에 찾아가는 길이거든요."
"걸로 가보소. 찾기 쉬울기니더."
길을 몰라 물었는데 아저씨도 권정생 선생님을 알고 계셨어요. 또다시 가슴이 벅찼답니다.
"일직이면 권 선생님 댁이 아냐?"
아저씨가 일러준 대로 따라가니 쉽게 찾을 수 있었어요. 선생님이 바로 며칠 앞서까지 살던 마을 조탑리. 마을에 들어서자 선생님이 오래 앞서 '예배당 종지기'를 하셨던 '일직교회'가 보였어요. 책에서만 봤던 교회를 보니 무척 반가웠어요.또 선생님 가시는 날, '영결식'을 치렀던 '조탑리5층전탑'이 마을 앞을 지키고 있어요. 작은 골목길을 지나 낮은 언덕이 보이고 그 아래 감빛 지붕이 보여요. 반가운 마음과 함께 가슴이 뭉클했어요.
집 들머리엔 키 작은 나무 두어 그루가 서서 대문 노릇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안에서 사람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요. 선생님은 이 집에서 혼자 사셨는데 누가 있을까? 집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안을 살피고 있는데,"어서 오세요. 권 선생님댁에 오신 것 맞지요?""아, 네 맞습니다."
우리를 반긴 분들은 바로, 권 선생님 장례를 맡아 애쓴 분들이었어요. '안동문화지킴이'면서 이번에 선생님 장례식 때 장례위원을 맡아 애쓰신 최윤환 선생을 비롯한 다른 몇 분과 아이도 둘이 있었어요. 장례식이 끝나고도 꾸준하게 이 곳을 찾는 사람을 맞이하느라 여기 와 있는 거였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한 주가 넘었는데도 날마다 와서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니 참 뜻밖이었어요. 마땅하게 빈집일 거라 여기고 왔는데, 따뜻하게 맞는 사람이 있어 가슴이 따뜻했답니다.
집 방문은 잠겨있고, 그 앞에 판화로 만든 영정이 있어요. 분향단 앞에는 그동안 펴내셨던 책, <강아지똥> <몽실언니> <바닷가 아이들>… 여러 권이 있어요. 이 모두가 선생님이 우리한테 남겨놓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발자국처럼 보였어요.
남편과 함께 분향단에 향을 피웠어요. 알록달록한 차림으로 서서 선생님을 처음 뵙는 것이 몹시 미안했지만, 가만히 고개를 숙여 눈을 감았어요. 그런데 그만 참았던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목이 메 견딜 수 없어요.
'선생님, 미안해요. 지난해에 우리가 올여름 휴가 때엔 꼭 찾아뵙겠다고 약속했는데, 선생님은 벌써 떠나시고 이렇게 이런 꼴사나운 차림으로 불쑥 찾아왔어요. 그래도 선생님 이해해주실 거죠?'
마음속으로 이렇게 투정부리듯이 눈물을 훔치며 방명록을 쓰고 있는데, 최윤환 선생이 우리를 달래주셨어요. "선생님이 사는 동안 몸이 아프셔서 워낙 힘들게 사셨어요. 어쩌면 그 아픔에서 벗어난 것이니까 너무 슬퍼할 일은 아닐 겁니다.""네. 그렇지요. 하지만, 많이 안타까워요. 저희는 올여름에 선생님을 꼭 찾아뵈려고 했는데, 그 약속 지킬 수도 없이 그만 돌아가셨네요." 최윤환 선생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어요. 이번 장례식 때 칠백 사람쯤 모였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선생님 살아계실 때에는 우리처럼 한 번도 만나 뵙지 못했대요.
"마음먹었을 바로 그 때에 오셨어야 했습니다"
선생님은 병들고 힘들어 어렵게 사셨어요. 그렇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삶'을 사신 것, 언제나 북녘 어린이를 가엾게 여기고 남과 북이 서로 미워하지 말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던 것 하며, 선생님 곁에서 틈틈이 돌보면서 느꼈던 이런저런 얘기를 하시는데, 가슴이 더욱 뭉클하고 뜨거웠어요.
분향을 마치고, 선생님이 화장을 해서 집 뒷산에 뿌려달라던 마지막 말씀대로 했다면서 산으로 안내했어요. 지난밤에 내린 비 때문에 조금 휩쓸려가긴 했어도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면서 우리를 데리고 갔는데, 감빛 지붕이 낮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참말로 하얀 가루가 곱게 뿌려져 있었어요. 살아계실 때 선생님의 손 한 번 따뜻하게 잡지 못했는데, 허리를 숙여 한 줌 재로 흩어진 소중한 뼛가루를 가만히 쓰다듬었어요. 이렇게라도 선생님을 만져보고 싶었어요.
뜨거운 가슴을 삭히며 최 선생이 하는 얘기를 귀 기울여 들었어요.
"저기 오른쪽 언덕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늘 선생님이 피해 계시던 곳이에요. 어떤 때에는 저기 아래 비닐 집에서 계시기도 했고요. 이렇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사람이 타고 온 차가 떠나고 난 뒤에야 집에 들어가시곤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익히 알고 있는 얘기였어요. 선생님은 사람을 만나는 걸 그토록 싫어하셨대요. 기자가 인터뷰하러 찾아왔다가 얼굴 한 번 뵙지도 못하고 돌아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난 궁금해서 물었어요.
"아니, 그런데 선생님은 왜 그렇게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셨대요? 선생님이 보고 싶어 찾아온 사람도 많았을 텐데요."
"선생님이 허리춤에 늘 오줌보를 차고 계셨잖아요. 그걸 새로 갈아 끼울 때면 무척 아파하셨어요. 한 번 갈아 끼우고 나면 온종일 아무것도 못할 만큼 아프고 힘이 드는데 그런 모습을 손님한테 보이기 싫었던 거예요. 그런데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에는 참 많이 외로워하셨어요. 아마 그때 찾아오는 이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만나주셨을 거예요."
이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목이 메고 가슴이 먹먹했어요.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우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최 선생도 틈틈이 목메어 하는 걸 봤어요.
"무엇이든 마음먹었을 때 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지난해에 꼭 찾아뵈어야지! 하고 마음먹었을 바로 그 때 오셨어야 했습니다."
살아가는 처지 때문에 선생님 찾아뵙기를 뒤로 미룬 건 참 잘못한 일이었어요. 아무리 짬을 내기 어려워도 그건 핑계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권 선생님 뼈가 뿌려진 언덕에서 최 선생과 나눈 얘기 가운데 이런 얘기도 있어요.
"'정승이 죽으면 초상집이 썰렁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 권 선생님은 한평생 가진 것 하나 없이 살면서 저 오두막에서 사셨는데도 이번 영결식 때 700명이 넘게 왔어요. 바로 저기 보이는 조탑리 5층 전탑 앞을 꽉 메울 만큼 많은 사람이 왔으니까요. 그런 걸 보면 유족 하나 없이 돌아가신 우리 선생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알 수 있지요."
선생님 계신 곳을 뒤로 하고 언덕을 내려와 다시 집으로 들어가니, 초등학교 아이 셋이서 손잡고 찾아왔어요.최 선생은 "아이고, 우리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시겠구나! 가장 귀한 손님이 오셨네" 하면서 아이들을 반갑게 맞으셨어요. 아이들이 분향하는 걸 가만히 지켜본 남편이 "저 어린 애들이 어떻게 알고 왔을까? 선생님한테 인사한다고 스스로 찾아오다니 참 기특하네"라고 말했지요.생각대로 우리 권 선생님은 아이들한테 가장 좋은 할아버지이자 '영원한 동무'라는 걸 저절로 느꼈어요.
선생님 유언대로 집을 자연으로 돌려주어야 하나?
이번에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남긴 말씀에 따라 화장해서 뒷산에 뿌렸고, 어린이 때문에 생긴 인세를 모두 어린이한테 써달라고 한 그대로 하리라고 믿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살던 집 문제를 놓고 서로 말이 다르다는 걸 여러 기사를 보며 알았어요. 여기에 와서 최 선생을 만났으니 꼭 물어보고 싶은 게 바로 이거였어요.
"저, 그런데 선생님이 이 집도 다 허물어서 자연으로 돌려달라고 하셨다는데, 그건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요즘 이 문제로 '선생님 뜻에 따라 집을 헐자!' 하는 쪽과 '그렇지 않다. 그대로 두어 아이들의 교육장으로 삼아야 한다' 하는 쪽이 서로 달라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지요.
"어느 쪽이든 집을 헐든지, 그대로 보존하든지, 선생님의 소중한 뜻을 기리자는 건 마찬가지라고 봐요. 그런데 저희는 이렇게 생각해요. 선생님 뜻대로 이 집을 헐어서 자연으로 돌려주는 것도 참 올바른 일이지만, 한평생 이 오두막에서 외롭고 가난하게 살면서 언제나 자연과 벗하면서 <강아지똥>과 <몽실언니>를 쓴 선생님이 사셨다는 걸 아이들한테 산 교육장으로 보여주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최 선생은 제게도 물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이런 기사를 보면서 남편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서 나름대로 우리 생각을 이야기했어요.
"네. 저희는 선생님이 떠나시기에 앞서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면, 선생님 뜻대로 해 드리는 게 가장 옳은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 선생님 뜻을 기린다는 일을 앞세워 돈벌이에 쓰이거나 사람 욕심 때문에 우리 선생님 뜻이 도리어 빛이 바라고 그 이름에 먹칠할까 봐 그게 가장 걱정이거든요. 또 그런 비슷한 예도 많이 봐 왔고요.""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보존하자는 쪽이에요. 지금도 지자체에서는, 하물며 살아있는 사람조차도 무슨 기념이니, 복원이니 하면서 야단법석인데, 여길 허물고 난 뒤에 나중에라도 '권정생기념관'이니 하면서 짓고 할까 봐 걱정인 거예요. 시간이 흐르면 틀림없이 그렇게 할 테니까요."
이 말을 듣고 보니,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아무튼, 아직 아무 결정도 내린 게 아니라고 해요. 무엇보다 돌아가신 선생님 뜻에 따른 가장 올바른 쪽으로 답이 내려질 거라고 했어요.권 선생님댁에서 보고 들으며 참 많이 깨달았어요. 늘 책에서만 보고 글로만 알았던 선생님의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마음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벅찼어요.
이제 그 분은 돌아가셨어도 그 뜻과 올곧은 마음만은 우리 곁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또 우리도 그 뜻을 따르며 그대로 이어갈 거란 마음을 다졌어요. 우리 권정생 선생님과 또 최 선생님, 그 밖에도 두 분 선생님들과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어요.뒷산에 곱게 뿌려진 선생님 넋처럼, 언제나 우리 곁에 살아계실 선생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은 알차고 아름다운 꿈을 가득 안은 듯 했답니다. 부디, 사람들 욕심 때문에 그 소중하고 아름다운 넋이 헛되지 않기를 참 맘으로 바라고 바라면서…….
2007.06.07 09:25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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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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