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놓칠까 빗길을 달리던 아버지의 자전거

경전선 예당역, 그곳에 가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등록 2007.06.09 17:07수정 2007.11.2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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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우리나라에 기차가 들어온 때는 일제강점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남 지역과 호남 지역을 단 한번에 이어주는 유일한 철도가 '경전선'이다.1922년경 순천에서 송정리 구간이 개통될 때, 예당역(전남 보성군 득량면)은 임시 승강장으로 운영됐다. 이후 1941년경에 역원을 배치해 간이역으로 운영하다가 1966년에 보통역으로 승격됐다고 한다.나는 1970년대 학창 시절 주말이면 단골로 이곳 예당역을 찾았다. 그때 운행했던 기차는 완행과 보급이었다. 보급 기차는 수요량이 적은 역사는 그냥 통과했고 완행기차는 역마다 모두 정차했다. 서민인 우리들은 교통비가 비싸고 시간이 불규칙한 버스보다는 기차를 많이 이용했다.내가 태어난 지역이 첩첩산중이라 초등학교 다닐 때는 기차를 구경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름 방학 때 동네 친구들과 같이 소풀을 먹이러 뒷산 정상을 올라가 저 멀리 어렴풋이 산 능선으로 기차 선로를 본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기차가 거북이 걸음으로 화통에 연기를 뿜으며 목청이 터지라 기적소리를 내면서 깔크막(비탈길)을 올라가는 것을 구경하면 아주 운이 좋은 날이다. 나는 기차와 인연을 이렇게 맺었다.선배들이 전수한 도둑열차 타기 비법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됐다. 바로 그 때부터 나는 기차와 인연을 맺었다. 토요일이면 오전 학교 수업이 끝나기가 바쁘게 남광주역으로 달려갔다(지금 남광주 역은 폐쇄됐다).용돈이 남으면 기차표를 구입해서 당당하게 대합실로 들어갔지만 용돈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도둑 열차를 타야 했다. 그때 남광주역 건널목은 아저씨가 한쪽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반대편에 있다가 기차가 역으로 들어갈 때 동시에 따라서 같이 들어가는 수법으로 도둑 기차를 탔다.그렇지만 기차에 오를 때부터 내 가슴이 통게통게(두근두근)하기 시작한다. 도둑 기차를 타고 나면 제일 먼저 할 일이 차장(승무원)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기차가 가고 있을 때 차표 검사를 하기 때문에 차장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차표 검사가 중간 칸쯤 할 때까지 차장과 간격을 유지하다 다음 역에서 정차할 때 재빨리 내려서 앞 칸으로 올라가 숨어야 한다(선배들에게 배운 수법이다).기차에서 내려 집에까지 가려면 중간에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약 40~50분은 가야 했다. 그나마 버스를 놓쳐 버리면 늦은 저녁까지 달빛 그림자를 밟으면서 동네 선배들과 같이 걸어야 하니 집에 도착할 때면 온 몸이 파김치가 되고 만다. 그래도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신 것을 볼 때는 피곤한 줄 모르고 행복해 했다.@IMG2@어렵살이 사는 아버지의 자식 사랑, 이보다 더 할까부모 곁을 떠나 살던 고1, 아마 초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시골집에 내려갔다 일요일에 광주로 올라 올 때였다.내가 자식 중에 아홉째라 당시 아버지는 많이 늙으셨다. 지금 같으면 남들이 보기에 할아버지로 착각할 정도셨다. 그래도 시골에 사시면서 유일하게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그 시절엔 면(面)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은 몇 안 됐다.아버지는 백발머리에 중절모자를 쓰시고 저고리에 마고자와 흰 고무신을 신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내가 초등학교 때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자전거를 배우게 된 것도 아버지의 덕분이었다.그때는 전화기가 마을에 한 집 정도 있을까 말까 했다. 그래서 광주에서 내려가야 자식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또 등록금을 낼 때도 미리 말씀을 드려야 준비를 해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깜박 잊고 미리 등록금 내는 마감날을 말씀드리지 못하고 내려가 시골집에서는 돈이 준비가 되지 못했다.한참 보릿고개 시절 우리 집은 농촌이라 곡식을 수확할 때가 아니면 돈이 없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등록금을 꾸러 이집 저집 다니시다 보니 광주로 올라갈 막차 시간이 다 됐다. 예당역에서 기차를 타려면 집에서 약 20분 동안 버스 타는 곳까지 걸어가야 했다. 또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약 50분 가야 예당역이 나왔다.이 날은 등록금 때문에 집안에 온 소동이 일어나다 보니 버스 막차를 놓치고 말았다. 걸어서 예당까지 갈려면 서너 시간을 가야 하니 걸어갈 수도 없고 우리 집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자전거를 이용해야 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다가 자전거를 타고 가자고 하셨다.이슬비가 보슬보슬 하염없이 내리고 있는 늦은 오후 나는 자전거 짐칸에 올랐다. 비포장도로를 터덕거리며 아버지께서는 큰돌멩이를 피하시려고 이쪽저쪽 건너시면서 자전거 발판을 힘차게 밟으셨다. 나는 이슬비를 피하려고 아버지 등 뒤에 묻었지만 얼굴로 들어오는 빗방울을 닦으면서 짜증이 났다.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중절모자를 우산 삼아 묵묵히 자전거 핸들을 잡고 아무 말씀 없이 기차 시간 놓칠세라 정신없이 달리셨다.예당역에 도착할 쯤에는 아버지의 앞 저고리와 바지는 이슬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도 열차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는 마음에 얼굴빛은 밝았다. 역 앞에 내리신 아버지는 나에게 "몸 건강히 밥 잘 먹고 열심히 공부해라"하시며 자전거 핸들을 집 쪽으로 돌리셨다.그리고 자식이 역사로 들어가지 않고 있으니 "어서 들어가거라! 기차 놓치겠다"하시면서 자전거 안장에 오르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부모 곁을 떠나 객지에서 혼자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땅거미가 밀려오는 늦은 오후 이슬비를 맞으면서 수십리 길을 다시 자전거를 타고 굽이굽이 산을 넘어 가신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빙 돌았다.@IMG3@자식은 평생 부모님에게 얼마나 효도할까?우리 집은 보성역과 예당역 중간에 산을 두서너개를 넘어가야 있다. 그래서 예당역을 찾거나 보성역을 찾는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예당역을 찾는 이유는 보성역에서 열차를 타면 사람들이 많아 광주까지 서서 가야 하고, 예당역에서는 기회가 좋으면 앉아 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이날은 벌교 조성 방면에서 사람들을 많이 타 내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되돌아가시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출발하는 기적소리에 내 눈은 창 밖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창가는 비가 와 이슬이 맺혀 밖이 보이지 않았는데 나는 자꾸 손바닥으로 창을 닦으면서 아버지가 가시는 길을 보고 있었다. 내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혹시나 가시다가 돌멩이에 부딪혀 넘어지지는 않으셨을까. 산 고개를 넘어가시면서 빗길에 미끄러지지는 않으셨을까. 온통 내 머리에는 어둡기 전에 아버지께서 무사히 집에 도착하셔야 하는데 하는 걱정이 앞섰다.짐을 가득 실은 기차는 예당역을 출발해 득량역을 지나 깔크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는 것이 힘겨워 기차가 가끔 기적소리를 냈는데 비가 와서인지 소리가 크고 애처롭게만 들렸다.기차는 터널을 끼고 나오니 가벼운 마음으로 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 마음은 아버지와 떨어진 예당역이 생각이나 무겁기만 했다. 이후 아버지는 아들에게 호강 한번 받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다.요즘에 내가 나이를 먹고 부모가 되어 보니 옛 생각이나 시골에 다녀오면서 예당역을 들러 봤다. 역사는 옛 모습이 사라지고 현대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아버지와 나의 만남이 서려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2007.06.09 17:07ⓒ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예당역 #학창시절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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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사회는 변화와 혁신을 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지방에서 주민에게 헌신과 봉사 하는 자세로 몸 담고 있으면서 주민이 알 권리를 알려야 할 의무 감을 갖고 이 곳 을 찾았다. "많은 지도 편달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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