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법 없이 인생을 산다는 건...

[시와 함께 살다 37] 윤성학 시 '당랑권 전성시대'

등록 2007.06.07 10:33수정 2007.06.07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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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랑권 전성시대


권법 없이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곳에는 사람 수만큼의 권법이 있다
익히더라도 강한 것을 익혀야 산다
나는 당랑권을 택했다
매미를 잡아먹는 사마귀의 전술이다

상대와 마주 섰을 땐 늘 중심을 뒤에 두고
정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그래야 혈을 지킨다
사각(死角)으로 돌다가!
연속적인 단타로 급소를 파고든다
그의 반격을 받아흘리며
쉼없는 상하연타를 구사해
승부를 몰아간다
나는 여기서 당랑권을 익혔다
강하게 파고들었다가
빠르게 빠져나오는
고수들을 보며 익힌 권법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당랑권이다

- 창비시선 261 윤성학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에서


1.

며칠 전의 일이다. 이제 잠 잘 시간이라서 밤인사를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 딸아이가 일분도 안 되어 다시 나와서 다급한 목소리로 아빠를 불러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또 귀뚜라미가 나왔냐?"

이미 침대 이불 속에 들어가 있던 나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딸아이는 벌레라면 파리조차도 질색을 하는데, 가을이 깊어가면서 가끔씩 집안에서도 귀뚜라미들이 발견되곤 했던 것이다. 정원의 풀숲이나 벽돌 틈에 사는 놈들이 낮에 환기를 하려고 열어놓은 창문으로 넘어오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 한밤중에는 귀뚜라미 소리에 잠이 깬 적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정원에서 들려오는 소리치고는 너무나 크고 또렷했다. 혹시나 해서 다음날 아침에 우리 침대 밑을 살펴보았더니 귀뚜라미 한 마리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깥 날씨가 점점 차가워지자 창문을 통해서 따뜻한 집안으로 들어온 놈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딸아이의 방에 들어갔는데, 귀뚜라미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사마귀였다. 뱃살이 통통하게 오른 사마귀 한 마리가 창문가 딸아이의 책상 위에 앉아서 위협하듯 앞다리를 쳐들고서 나를 올려다 보았다.

'햐, 이놈 봐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숙녀의 방에 함부로 침입한 놈이 어디 앞다리를 쳐들고 대항을 해. 이런 고얀 놈 같으니!'

마음 같아서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서 몹시 추운 집 바깥 어둠 속으로 당장 내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자세가 놈의 타고난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잘 아는지라, 나는 서재로 쓰고 있는 방의 컴퓨터 책상 위로 놈을 옮겨 놓고 잠을 자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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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다음날 아침에 보니, 놈은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는 스피커에 매달려 있었다. 책상 면과 컴퓨터 모니터가 모두 매끈매끈해서 어디 붙잡을 데가 없는 반면, 스피커는 천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 있으니 붙잡고 올라가서 거기서 밤을 지샌 모양이었다.

창문 밖을 쳐다보니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어서 햇빛이 좀 나오면 놓아주자고 생각하며 컴퓨터를 켰다. 그러자 윈도우 시작 프로그램이 작동되면서 스피커에서 갑자기 터져나오는 소리에 놈은 혼비백산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앞다리 하나를 쳐들었다. 그 모습이 이젠 위협적으로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가련해 보였다.

그래서 사마귀를 이번에는 창틀로 옮겨주었다. 갑작스럽게 바뀐 위치 때문에 꼼짝도 안 하고 있던 놈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어기적어기적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더 기어갈 자리가 없어지자 이번에는 창틀을 타고 올라가서 납짝 달라붙었다. 마치 자신이 떠나온 안뜰이 그리워서 창문 너머 풍경을 바라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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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나는 아직 비가 완전히 그치지 않았지만 놈을 바깥으로 놓아주기로 했다. 창문을 열고 창문 바깥 턱의 벽돌 위에 놈을 옮겨놓았다. 그런데도 놈은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망정, 또 그 위협적인 자세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나는 가소롭다는 듯이 놈의 몸을 옆으로 밀고나서 창문을 닫았다.

2.

놈을 내보내고 나서 나는 사마귀의 자세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돋아나 있는 앞다리를 쳐들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사마귀의 공격 자세는 인간인 내게는 참으로 가소롭게 여겨졌다. 하지만 풀숲에 날아드는 나비, 벌 그리고 매미 같은 곤충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협이 될 것인가.

실제로 나는 우리 집 안뜰에서 사마귀가 다른 곤충들을 잡아 먹는 살육의 현장을 여러 번 목격한 바 있다. 마치 풀잎의 일부분이나 되는 것처럼 풀잎 뒤에 교묘하게 몸을 숨기고 몇 시간 동안이나 꼼짝 않고 있다가 느릿느릿 풀잎 위를 기어오는 나비 애벌레를 잡아채는 사마귀의 동작은 얼마나 날래고 정확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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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애처롭게 꿈틀거리는 애벌레를 앞다리로 꽉 눌러서 꼼짝 못하도록 해놓고 몸통째 씹어먹는 사마귀의 모습은 끔찍했다. 하지만 그 잔혹한 살육의 현장을 나는 그냥 지켜보았을 뿐 개입하지 않았다. 애벌레를 잡아 먹은 저 사마귀 역시 어쩌면 머지 않아 눈 밝은 새의 먹잇감이 될지도 모를 일인데, 그렇게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 자연의 질서라면 그것이 비록 잔혹하고 냉혹해 보일지라도 존중해야 마땅한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마귀 암컷은 짝짓기를 끝내고 나서 기운이 달려 미적거리는 숫컷을 잡아먹기도 한다고 한다. 잔혹하다 못해 엽기적이기까지 한 이러한 암컷 사마귀의 행동 역시 교미 후 알을 낳기 위하여 힘을 비축해 놓으려는 어미의 본능에 따른 것이라고 하니,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한 뭇생명들의 생존 본능은 얼마나 치열하고 또한 무모한 것인가!

3.

사마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물음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떤가? 우리 인간이 자연의 절대적 지배를 받던 시절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온 현대 문명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생물학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 역시 사마귀처럼 약육강식의 생존법칙을 따르고 있지 않겠는가?

이제 삼십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중견 직장인 윤성학 시인이 자신의 첫 시집의 표제로 삼은 시 '당랑권 전성시대'를 읽어 보면, 위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말한다. 치열한 생존경쟁이 펼쳐지고 있는 직장 생활에서 '권법 없이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한 것을 익혀야 하는데, 그는 '매미를 잡아먹는 사마귀의 전술'인 당랑권을 선택했노라고.

직장 생활을 몇 년이라도 해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러한 선택이 나는 무섭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상대의 급소를 파고들어 치고 짓밟고 무너뜨리고 쓰러뜨려야만 한다면, 상대 역시 그러할진대 그 무한경쟁의 끝이 과연 어떻게 될지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마귀가 아니듯이 당랑권은 인간이 배워야 할 권법이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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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그러나 슬프게도 자본주의 문명의 최고 단계인 전세계적 경제 자유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세상은 점점 냉혹한 약육강식의 생존법칙이 지배하는 자연세계를 닮아간다. 부와 권력을 쥔 소수의 사람들 앞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꼼짝없이 그들의 손아귀에 놀아날 수밖에 없게 된다. 돈 없고 힘 없는 이들이 약육강식의 살벌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길이란 그들 고수들을 보면서 당랑권을 익히는 수밖에 없다.

더욱 슬픈 것은 이제는 이러한 당랑권이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디에서든지 또한 직장인들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서든지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유치원과 학교에서도 당랑권으로 무장한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이제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익힌 당랑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고작 자기 한 몸을 지키고 더 자라서는 자기 가족을 지켜내는 것에 불과할 뿐이며, 그나마 그것도 상대방의 패배와 희생에 힘입은 것이라면 얼마나 초라하고 서글픈 승리일 것인가. 오히려 돈 없고 힘 없는 자들이 그렇게 당랑권으로 서로 치고받도록 하는 것이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 이른바 고수라는 자들이 노리고 있는 술책이 아니겠는가.

위협하듯 앞다리를 쳐들어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사마귀 놈을 내가 가련하고 가소롭게 여겼듯이 고수들 역시 그렇게 당랑권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분명 코웃음을 치고 있을 것이다.

윤성학 시인이 이것을 모를 리 없으니, 위에 인용한 시는 생존을 위하여 당랑권을 익혀야 하는 직장인들의 슬픈 현실을 반어적으로 그려낸 시로 읽혀진다. '강하게 파고들었다가/ 빠르게 빠져나오는' 당랑권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의 권법일 뿐이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버려야만 하는 권법인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살 때, 나 역시 그렇게 나의 혈을 지키고 또한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으려고 당랑권의 자세로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내 몸 속에는 그렇게 익힌 당랑권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어서 여기 뉴질랜드에서 새 삶을 살아가면서도 나도 모르게 당랑권을 취하게 되는 순간들이 제법 많다.

아,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나는 가소로운 당랑권을 버리고 언제나 더불어 함께 사는 공존의 자세를 완전히 익히게 될 것인가.
#윤성학 #당랑권 전성시대 #사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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