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의 계보를 잇는 나희덕의 시 세계

나희덕 외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사, 2007)

등록 2007.06.07 15:20수정 2007.06.07 17:51
0
원고료로 응원
a 나희덕 외 지음-제22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사)

나희덕 외 지음-제22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사) ⓒ 문학사상사

문학사상사에서 주관하는 2008년 제22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은 나희덕 시인에게로 돌아갔다. 대상작은 '섶섬이 보이는 방-이중섭의 방에 와서'이다.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던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


- '섶섬이 보이는 방-이중섭의 방에 와서' 전문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화가 이중섭은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다시 1951년 제주도로 건너가 서귀포의 한 고방(庫房)을 빌려 1년 남짓 생활을 한다. 가족과 함께 했던 제주도의 생활이 화가 이중섭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그 후에 이중섭은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영양실조와 병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나희덕 시인이 제주도 여행 중 서귀포에 있는 화가 이중섭이 살던 고방, 다시 말해 '섶섬이 보이는 방'에 머물면서 얻은 생각을 시화(詩化)한 것이 인용한 소월시문학상 대상작인 '섶섬이 보이는 방-이중섭의 방에 와서'이다.

일본 유학시절 턱(아고)이 긴 이(李)씨라 하여 '아고리'로 불려진 이중섭이 제주도 바닷가에서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이남덕)와 두 아들 태현(야스가타), 태성(야스나리)과 함께 한 행복했던 삶, 그리고 이중섭의 작품으로 시상은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평화로운 삶의 풍경 이후 시의 종결부에 불우했던 중섭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마음을 담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라는 시행을 얹음으로써 큰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문정희 시인은 심사평에서 나희덕의 시를 두고 "언어의 외연이 주는 자연스러움 속에 깊은 내면의 울림을 새긴 이 작품은 화가 가족이 잠시 살았던 섶섬에서의 그림 같은 삶의 풍경을 통하여 결국은 우리 삶이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와 같다는 본질적 깨우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또 소월시문학상 심사위원회(김남조·오세영·송수권·문정희·권영민)에서 제22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선정 이유를 "나희덕 시인은 뛰어난 언어적 감각과 생태주의적 관점을 통해 인간 현실의 문제에서부터 존재의 심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어두운 현실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면서도 날카로운 비판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시인의 지적 절제와 균형은 한국 시가 빠져들고 있는 정서의 편향을 극복해 나아가는데 있어서 하나의 전범이 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밝히고 있다.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은 대상 수상작 나희덕의 '섶섬이 보이는 방-이중섭의 방에 와서' 외 13편의 신작시와 대상 수상 시인의 자선 대표작 15편, 그리고 나희덕 시인의 수상 소감과 문학적 자서전, 작품론(신형철) 및 작가론(장석남)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나희덕 시인과 마지막까지 수상의 경합을 벌였던 8분의 시인, 즉 이승하, 송찬호, 정끝별, 이정록, 박라연, 손택수의 작품이 각각 8편씩 실려 있다.

'소월시문학상'은 현대문학상과 미당문학상과 함께 한국의 시부문의 중요한 문학상이다.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은 지난 한 해 동안 한국 시단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을 쓴 시인의 대표시와 시인 자신의 내면 세계 및 그 시세계를 집중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어 시를 좋아하는 독자에게 여간 좋은 책이 아닐 수 없다. 또 우수상을 수상한 6명의 48편의 작품을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읽는 기쁨도 함께 얻을 수 있다.

나희덕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슬픔을 줄곧 노래해왔다는 점에서, 서정적 전통의 자장磁場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연을 통한 시적 발견에 주로 의존해왔다는 점에서, 저는 소월의 식솔 또는 후예"라고 자신의 시 세계를 자평하고 있다.

또 "그러나 저의 시는 아직 소월의 시가 품고 있는 어떤 귀기(鬼氣), 또는 죽음에 육박하는 근원적인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 듯합니다. 시인이 된 지 20년이 가까워오면서도 스스로의 무의식을 제대로 대면하지 못한 탓입니다. 의식의 강물을 얼마나 더 퍼내야 그 바닥을 볼 수 있는 것인지, 언어의 두레박을 던지고 거두어들이면서 막막해질 때가 많았습니다"라면서 자신의 시세계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의 시적 모색을 이미 밝혀놓고 있다.

"무의식의 심연을 향해 걸어들어가"면서 퍼 올릴 나희덕의 다음 시 세계가 자못 궁금해진다. 그는 소월의 계보를 당당히 잇고 있는 한국 서정시의 대표시인이기에 그의 시적 성과는 한국시단의 성과이기도 하리라.

우리 시대 또 한 명의 빼어난 서정시인 장석남은 작가론인 '한 정직한 우정의 역사'에서 나희덕의 시 세계를 "부유하는 것에 대한 불안한 기억은 이후 모든 부유하는 것에의 애정과 연민으로 연결되며, 모든 뿌리내려야 할 것의 배후가 되어 키우는 존재로까지 자신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몇 해 전 아무 연고도 없는 광주로 직장과 생활의 거처를 옮겨간 나희덕 시인. 그는 벌써부터 광주와 무등산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서정의 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무등산을 통해 광주의 역사와 아픔을 진중한 언어로 노래한 또 한편의 그의 대표작 '그가 먹구름 속에 들어 계셨다'를 읽으며 글을 끝맺어야 하겠다.

그가 보이지 않으니
가슴의 火傷 또한 보이지 않았다
동쪽 창으로 멀리 보이던 無等
갈매빛 눈매는 성글고 그윽하였으나
그 기억의 분화구를 들여다보기 두려워
한 번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너무나 큰 죽음을 보아버린 눈동자가
저리도 평화로울 수 있다니,
진물 흐르는 가슴이 저리도 푸르다니,
그러나 오늘은 그가 먹구름 속에 들어 계셨다

그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주 가까운 숨소리에 잠이 깨었다

밤마다 그의 겨드랑이께 숨은 마을로 돌아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잠이 들면
그는 조금씩 걸어 내려와
어지러운 내 잠머리를 지키다 가고 했으니
그를 보지 않은 듯 나는 너무 많이 보아온 것이다

먹구름이 걷히자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그의 등이 보였다

無等에게로 돌아가는 無等,
녹음 속의 火傷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 손에는 거기서 흘러내린 진물이 묻어 있었다
그의 겨드랑이에서 깨어났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나희덕 시인에 대하여 

나희덕 시인은,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 게>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 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 산문집으로《반통의 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일연문학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나희덕 시인에 대하여 

나희덕 시인은,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 게>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 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 산문집으로《반통의 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일연문학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섶섬이 보이는 방 외 - 2008년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나희덕 외 지음,
문학사상사, 2016


#제22회 소월시문학상 #나희덕 #문학사상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3. 3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4. 4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5. 5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