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안에 갇힌 새, 날아도 배 안이다

[늘근백수의 객적은 길 떠나보기 8] 칼리지 피오르

등록 2007.06.09 17:12수정 2007.06.1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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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스카의 아침은 뱀 꼬리보다도 더 길게 늘어져 있다. 요람처럼 아늑하게 흔들리는 배 안의 잠자리에서 설핏 눈을 떴을 때, 발코니 창 너머로 천천히 뒤로 미끌어져 가는 눈 덮인 산들이 먼저 보이고, 그위로 자욱히 낀 구름 속에서 한 발이나 높이 솟은 태양이 성낸 듯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늦잠을 잤나보다 하고 허겁지겁 일어나 시계를 보니, 시간은 겨우 4시 30분. 알라스카의 아침은 밤이 오기도 전에 먼저 와 있는 듯하였다. 지금 이 시간대를 새벽이라 불러야 할지, 아침이라 불러야 할지, 낮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하기 그지 없었다. 마치 뱀의 어디부터가 꼬리이고 어디부터가 몸통인지 구분이 안가는 것과 흡사하다고나 할까.

a 뱀 보다 길게 꼬리를 내린 알라스카의 기다란 아침

뱀 보다 길게 꼬리를 내린 알라스카의 기다란 아침 ⓒ 제정길

창을 열고 발코니에 나가보니, 바다에는 유빙이 둥둥 떠 다니고, 건너편 산들 빙하에 덮여 추운 듯 오돌오돌 떨고 있다. 하늘은 반쯤 얼굴을 찌푸린 채 인상을 쓰며 가라앉아 있고, 뱃전으로 바람 낮게 불어 물보라를 하얗게 일구며 스스로 창백해져 뒤로 달아난다.


a 유빙이 둥둥 떠 다니는 칼리지 피오르

유빙이 둥둥 떠 다니는 칼리지 피오르 ⓒ 제정길

크루즈 여행의 좋은 점이란 자면서도, 먹으면서도 심지어 책을 읽으면서도 눈만 뜨고 있으면 경치가 저절로 내 눈 안에 찾아들어와 준다는 점이다. 자는 동안 배는 이미 칼리지 피오르(College Fjord)에 들어서 천천히 그 주변을 유영하듯 흘러가고 있었다. 피오르(Fjord), 빙식곡이 침수하여 생긴 좁고 깊은 협만(峽灣), 초등학교 때나 들어보았던 말이 이제 내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a 작은 섬 만한 유빙

작은 섬 만한 유빙 ⓒ 제정길

협만은 낮게 산맥을 이루었고, 수만년을 그들을 침식해온 빙하(Glacier)는 아직도 그들의 몸을 붙잡고 틈만 나면 바다로 뛰어들고 있다. 산은 깎이어 바다가 되고 바다는 얼어서 육지처럼 되었다. 가까이서 빙산 하나 물에 떠서 마치 섬인 양 행세한다.

a 칼리지 피오르의 글레시아(Glacier)

칼리지 피오르의 글레시아(Glacier) ⓒ 제정길

아침식사를 위해 14층에 있는 뷔페식당으로 올라갔다. 선내의 식당 중 가장 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사람들은 말 그대로 각양각색이었다. 색깔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고, 높이가 다르고, 넓이가 다르고, 말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달랐다. 음식 또한 각양각색으로 만들어져 홀 입구에 배열돼 있었다. 그러나 조찬용이라서 그런지 예상만큼 다양하지는 못했다. 특히 한국음식 비슷한 것은 눈을 씼고 봐도 없었다. (거참, 라스베이거스 대형 호텔 뷔페에는 김치와 김밥도 있던데.)

a 14층 뷔페식당

14층 뷔페식당 ⓒ 제정길

식사 후에는 선내를 한번 둘러 보았다. 배 안에는 1000여개의 객실을 비롯하여, 수십 개의 식당과 바, 세 개의 수영장, 그리고 극장, 공연장, 카지노, 체력단련장, 골프연습장, 미니 운동장, 조깅 트랙, 당구장, 카드룸, 도서실, 인터넷 카페, 미용원, 세탁실, 경매장 등 별의별 시설물이 다 있었다.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식용 채플도 있었다. 시설들은 깨끗하고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

a 가장 아늑하고 전망이 좋으며 음악이 있는 도서실

가장 아늑하고 전망이 좋으며 음악이 있는 도서실 ⓒ 제정길

마침 지나는 길에 들른 5층 아트리움 로비에서는 마티니 칵테일 쇼가 한창이었다. 바텐더 몇 명이 나와서 칵테일 만드는 시범을 보이고 그 만들어진 칵테일을 손님 중 가장 춤 잘추는 사람에게 주는, 어찌 보면 싱거운 행사인데 사람들은 주저없이 나와서 춤을 추고 칵테일 한잔을 얻어먹고는 아주들 좋아하였다. 5층부터 8층까지 툭 터인 공간에서 만인 주시 하에 스스름 없이 즐기는 그들을 보면 그 개방성이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다.

a 아트리움 로비에서 벌어지는 칵테일 쇼를 보고 있는 승객들

아트리움 로비에서 벌어지는 칵테일 쇼를 보고 있는 승객들 ⓒ 제정길

정오 무렵부터는 간간히 비가 내렸다. 비는 속삭이듯 아주 조용히 내려 바다 위에 작은 점 하나를 찍고는 가만히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바다는 비가 찍은 점들로 인해 마마 자국난 얼굴을 한 채 잠시 평형을 잃은 듯이 약간 울렁이었다. 산들은 아직 눈을 뒤집어 쓰고 물가에 도열해 있고 새 몇 마리 배 주위를 날아보다가 사라진다. 배는 이제 칼리지 피오르를 벗어나서 글레시어 베이(Glacier Bay) 국립공원을 향하고 있는 모양이다.

a 비는 하나의 점으로 소실된다

비는 하나의 점으로 소실된다 ⓒ 제정길

점심은 5층에 있는 애니타임(AnyTime) 식당에 가서 먹었다. 엊저녁과 마찬가지로 백인들과 합석이었다. 똑같은 절차가 시작되고 비슷한 말들이 오고 갔다. 그들의 먹성 하나는 정말로 대단했다. 그들의 부피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가는 이유를 알만했다. 케인즈가 말했던가. 먹는 양은 산술 급술적으로 늘어나나 부피(몸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a 실내 수영장(익일 촬영)

실내 수영장(익일 촬영) ⓒ 제정길

오후에 14층 실내 수영장의 창가에 앉아 비내리는 바다를 무연히 보고 있는데 작은 몸피의 새 한 마리가 수영장 안을 빙글빙글 날고 있는 게 보였다. 천정과 벽면이 유리로 덮여 있는 이 수영장에 행여 길을 잃고 잘못 날아들어온 새인지, 아니면 키우는 새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는 날다간 쉬고 날다간 쉬곤 하지만 종내 밖으로 날아가지는 못하였다.

a 그는 그저 떠돌 뿐.....

그는 그저 떠돌 뿐..... ⓒ 제정길

빗발 점점 굵어지는 바다에 1970 마리의 스스로 날아든 새들과 800 마리의 벌이를 하기 위해 머무르는 새들과 한 마리의 길 잃고 허덕거리는 새를 태우고 프린세스호는 남진을 계속한다. 닿아야 할 항구는 이틀이나 더 가야 하고 바다는 차차 물비늘을 세우기 시작한다, 성난 고기처럼. 우리는 무엇을 향하고 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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