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때문에 학생들이 지각을 한다고?

긴 기차로 인해 헤리슨버그 고등학교에서 생기는 해프닝

등록 2007.06.11 13:44수정 2007.06.11 13:4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이른 아침, 등교와 출근을 가로막고 있는 긴 기차.

이른 아침, 등교와 출근을 가로막고 있는 긴 기차. ⓒ 한나영

a 노란 스쿨버스도 기차 건널목 앞에 서 있다. 오늘은 지각도 OK.

노란 스쿨버스도 기차 건널목 앞에 서 있다. 오늘은 지각도 OK. ⓒ 한나영

"각 교실에 계신 선생님들께 알려드립니다. 오늘 '기차로 인하여' 일부 학생들의 지각이 예상됩니다. 출석 체크하실 때 이 점을 감안하여 늦게 오는 학생들의 지각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리슨버그 고등학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침 안내방송이다. 스쿨버스나 승용차로 등교하는 이 학교 학생들은 오전 7시 45분에 1교시가 시작된다. 출결 사항을 '엄격하게' 점검하는 학과 선생님들은 이런 안내 방송이 나오면 출석 체크를 잠시 미루게 된다. 왜냐하면 무서운(?) 기차가 떴기 때문이다.

아니, 기차가 무섭다고? 기차 때문에 학생들이 지각을 하는 거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어렸을 때 많이 불러봤던 기차 노래를 다시 한 번 불러보자.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노래에도 나오듯 기차는 길다. 기차가 길다는 것은 기차 한 량의 몸체가 길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몇 량을 합쳐 길기도 하다는 말이고. 그런데 이곳 해리슨버그의 기차는 몸체뿐 아니라 길이도 엄청나게 길다. 보통 수 십량, 많게는 백 량에 가깝다. 정말 백 량 가까이 되냐고?

"YES!"


얼마나 긴지 한 번 세보자

해리슨버그 사람들은 다 안다. 우리 도시를 가로지르는 기차가 얼마나 긴지…. 그만큼 유명하다. 어느날 아침, 직접 경험한 일이다. 차를 몰고 출근을 하는데 '비상사태'가 발생할 조짐이 보였다. 기차 경적이 울리고 건널목 차단기에 빨간불이 들어오는 바로 그 상황.

"아, 안 돼!"

기차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속력을 냈다. 속히 기찻길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건널목 차단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단기가 완전히 내려온 것은 아니어서 잘만 하면 길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문득 떠오른, 한국에서 봤던 익숙한 교통사고 문구!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

브레이크를 밟았다. 덕분에 건널목 차단기 앞에 1등으로 서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허겁지겁 카메라를 꺼내들고 그참에 기차의 요모조모를 뜯어보기로 했다.

'도대체 이 놈의 기차는 얼마나 긴 거야. 한 번 세봐야겠다.'

a "길으면 기차, 도대체 얼마나 긴지 한 번 세 보자. 시작! 하나."

"길으면 기차, 도대체 얼마나 긴지 한 번 세 보자. 시작! 하나." ⓒ 한나영

a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차 행렬.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차 행렬. ⓒ 한나영

a 마침내 긴 기차가 지나가고 차단기가 올라가자 기다리고 있던 승용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긴 기차가 지나가고 차단기가 올라가자 기다리고 있던 승용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한나영

"하나, 둘, 셋…… 50, 60, 70, 80, 81, 82, 83, 84, 85,…"

아, 이러니 학생들이 지각을 하는구나. 학교에서 지각을 체크하지 말라는 안내방송이 나올 만도 하고. 게다가 심심하면 이 기차는 중간에 선 채 옴짝달싹 안 하는 경우도 있다. 짐을 싣고 내리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 모두 이제는 이골이 난듯 태평하게 기다린다. 물론 성질 급한 운전자들은 차단기가 내려올 기미가 보이면 바로 중앙선을 넘어 되돌아가는 순발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곳에선 중앙선을 넘는 게 허용되기도 한다.)

하여간 이 기차는 화물만 싣고 달리니 우리가 타봤던 새마을호나 KTX의 아름다운(?) 속도와는 비교도 안 된다. 이 철길을 이용하여 남북전쟁 당시 병사들과 군수화물을 실어 날랐다고 하는데 아마도 전쟁 당시의 속도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듯 하다.

a 기차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떠난다.

기차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떠난다. ⓒ 한나영

a 캠퍼스를 가로질러 기찻길이 놓여 있다.

캠퍼스를 가로질러 기찻길이 놓여 있다. ⓒ 한나영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기찻길

인구 5만이 채 안 되는 이곳 해리슨버그에는 제임스메디슨대학교(JMU)가 있다. 대학도시라고 할 만큼 이곳에서 JMU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높다. 2년 전, 해리슨버그에 정착하고 대학을 둘러볼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바로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철길이었다.

a

ⓒ 한나영

아, 기찻길이 있네.

길게 뻗은 철길은 정겹고 포근했다. 마치 옛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철길 너머에서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나를 맞아줄 것 같은 따뜻한 풍경이었다. 철길 옆에 나란히 늘어선 푸른 나무들도 그런 추억의 장면을 연상시켜 주었다.

파릇파릇 돋아난 꽃망울과 무성한 신록, 알록달록 단풍과 하얀눈으로 뒤덮인 사계절의 자연은 철길을 더욱 낭만적으로 만들어줄 아름다운 배경이었다.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철길과 자연의 멋진 조화는 분명 이런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상상의 날개를 접게 한 '현실' 이 있었다.

죽기 살기로 뛰는 학생들

"100미터 달리기 선수 저리 가라 할 정도예요. 기차 경적소리가 들리면 학생들은 죽기 살기로 달리죠. 안 그러면 강의에 늦기 십상이니까요."

이 학교 학생들의 증언이다. 기차가 뜨면 도리없이 '하세월'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기차에 대해 낭만이고 뭐고를 찾을 계제가 아닌 듯도 싶다.

하지만 이런 냉엄한(?) 현실 속에서도 기차에 대한 내 생각은 여전히 추억의 방주다. 길게 뻗은 기찻길을 보며 먼 데를 꿈꾸었던 낭만의 청춘 시절,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으니까.

a 기차, 기찻길은 추억이고 낭만이고 그리움이다.

기차, 기찻길은 추억이고 낭만이고 그리움이다. ⓒ 한나영

덧붙이는 글 | <기차와 함께 떠나는 여행- 기차에 얽힌 사연> 공모 기사.

덧붙이는 글 <기차와 함께 떠나는 여행- 기차에 얽힌 사연> 공모 기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2. 2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3. 3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4. 4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5. 5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