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마약류를 관리하는 검찰 등 관계당국을 긴장케 한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2001년 이후 국내에서 처음으로 필로폰 제조 사범이 붙잡힌 것이다. 그런데 범인들의 필로폰 추출 방법이 이전 경험을 뛰어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재미교포 추모씨와 최모씨는 지난 2월 6일 서울 종로 일대에서 100만원 어치의 감기약을 구입해 충남 청양 소재의 인적이 드문 야산에서 환각성분이 담긴 필로폰 50g을 추출했다. 일반 시중에서 살 수 있는 감기약을 가지고 마약을 제조한 이 사건이 알려지자 사법당국뿐만 아니라 제약업체와 의료업계도 비상이 걸렸다.
범인들이 사용한 감기약은 의사 처방전이 필요 없는 일반 의약품으로 주로 코감기 환자에게 사용된다. 이 감기약에는 콧물과 코막힘 등의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에페드린'이라는 성분이 함유됐고, 범인들은 이 성분을 가지고 필로폰 추출에 성공했다.
감기약으로 만든 필로폰... 업계 당혹
문제는 국내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복합제 감기약'에는 에페드린 성분이 필수적으로 함유됐다는 것. 종합감기약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국내 의약정보 사이트 '킴스온라인'에서 범인들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염산슈도에페드린'을 검색한 결과 생산유통중인 단일제가 10개, 복합제는 무려 104개나 있었다. 에페드린 성분만 포함된 단일제는 2005년 식약청이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했으나, 복합제는 시장 사정을 고려, 지금까지 일반의약품으로 관리하고 있다.
일반의약품 관리대상인 복합제 감기약이 마약범죄에 악용된 사건이 알려지자 각계의 반응은 의약품 관리에 구멍을 방치한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에 대한 비난으로 쏟아졌다.
특히 대한의사협회가 강경한 입장을 들고 나왔다. 의사협회는 지난 2005년 에페드린류 단일제에만 전문의약품 전환을 실시한 식약청의 안일한 대응을 문제삼으면서, 이번 기회에 에페드린류 복합제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마약 단속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검찰 역시 같은 입장.
그러나 약국에서 손쉽게 구매가 가능한 에페드린 성분이 함유된 감기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할 시 많은 불편이 예상됐다. 당장 환자들은 가벼운 감기에도 병원을 찾아 처방전을 끊고 약을 이용해야 한다. 제도를 전환할 시 1년 3천억이라는 막대한 비용도 소요될 것으로 예측됐다.
이 돈은 고스란히 일반 국민의 의료비, 건겅보험비 상승으로 이어져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낳는다는 우려다. 이 때문에 소비자 단체나 약사회 등은 복합제 감기약에 대한 전문의약품 전환에 확고한 반대 입장에 섰다.
이렇듯 각계의 이해관계가 엇갈리자 식약청은 처방전을 내놓는데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지난달 14일 녹색소비자연대, 한국소비자연맹 등 소비자 단체와 의사협회, 약사회 등 이해 단체가 참여하는 전문가회의를 열어 일단 반응을 지켜봤다.
전문가회의에서 다수 의견은 마약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는 복합제 감기약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은 언급됐으나,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오로지 의사협회만 강력하게 전문의약품 전환의 뜻을 펼친 것으로 전해진다.
전문의약품 전환 현실상 어려워
식약청은 더 이상 망설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에페드린이 함유된 복합제 감기약에서 마약성분을 추출할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범죄의 악용될 우려가 컸다. 실제로 일부 포털사이트에서는 감기약에서 필로폰을 추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문의와 해설이 뒤따랐다. 약국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품목이라 빠른 시간 안에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혹시 모를 모방범죄의 개연성도 충분했다.
또 안팎의 비난이 어느 때보다 거셌다. 고경화 한나라당 의원은 "식약청이 복합제 감기약의 마약전환 가능성에 대해 사전에 인지하고도 단일제 감기약만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조치해 사실상 복합제 감기약을 일반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방치했다"고 주장했다. 고 의원은 2005년 11월 식약청 내부 회의 결과문서를 공개하면서 "에페드린류 단일정제는 전문의약품으로 지정하고, 향후 에페드린류 함유 복합제에 대한 필로폰 전용 등의 문제발생 시 재검토 요망"이란 당시 조치는 식약청의 소극대응이었다는 판단이다.
더욱이 식약청이 마약전환이 가능한지 수독률 검사 등 일련의 실험도 행하지 않고 복합제에서 마약성분을 추출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갖고 무대책으로 일관했다는 게 고 의원의 주장이다. 단 고 의원은 복합제 감기약의 전문의약품 전환에 대해서는 조심스런 입장을 전하면서, 슈도에페드린 성분을 대체할 수 있는 물질개발과 일반 약국의 판매 제한을 촉구했다.
식약청의 해답은 에페드린 성분이 들어간 복합제 감기약의 전문의약품 전환 대신 개인당 판매 제한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오로지 의사협회와 검찰만이 소수 의견을 내놓는 상황에서 식약청도 다수를 따른 것이다.
지난 5일 식약청은 사건이 발생한 지 거의 한달 만에 '감기약 마약류 불법전용 방지대책'을 내놓았다. 주 내용은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한 판매 제한 조치로, '에페드린류' 성분이 함유된 감기약(시럽제 및 액제 포함)을 3일 용량(720mg)을 초과하여 구입할 때 판매일자 및 판매량, 구입자 성명 등을 기재하는 것이 골격이다.
판매제한 조치는 미봉책에 불과
즉, 같은 약국에서 한번에 3일 용량치(720mg)의 복합제 감기약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조치는 아무래도 약을 이용하는 소비자 입장과 판매하는 제약회사의 입장이 반영됐다.
식약청은 친절하게도 보도자료에서 "이번 판매제한 조치는 감기약을 다량 구입하는 경우에 한하여 적용하는 것이며, 소비자들이 약국에서 통상적으로 구입하는 수량의 범위 내에서는 종전처럼 구입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고 전하면서 소비자 불편 최소화에 초점을 맞췄음을 인정했다.
또 "시중에 판매되는 염산슈도에페드린이 함유된 코 감기약의 경우 1정(캅셀)당 60mg, 120mg 함유제품이 있으며, 각각 12정/캅셀(4일분), 6정/캅셀(3일분)로 포장된 상태"라고 언급하며, 제약업계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시사했다. 식약청은 이번 조치가 '매부좋고 누이좋은' 결과라는 판단이다.
식약청 대책에 즉각 반응한 건 역시 의사협회다. 약사회나 소비자 단체 등 다른 관련업계는 찬성인지 반대인지 공식입장을 내놓지는 않았다. 대한의사협회는 "식약청이 발표한 약국 판매제한 조치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이 될 수 없고 임시방편의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환자의 감기약 접근성과 건보재정 증가로 인해 복합제 감기약의 전문약 전환이 어렵다는 입장은 국민들의 필로폰 접근성까지 키워 결국 국가적으로 소탐대실"이라는 우려의 뜻을 전했다.
에페드린을 함유한 복합제 감기약의 전문의약품 전환을 주장하며, 의사의 권익을 내세운 의사협회의 반대 입장은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의사협회를 제외한 다른 이해단체들의 반응도 의외로 유보적이었다. 소비자 단체나 약사회 등은 식약청 대책에 몇몇 불만을 나타냈다.
강정화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처장은 "구입자의 성명을 기재하는 조치 등은 소비자 입장에서 불편을 초래한다"며 "감기약이 마약류로 불법 전용되는 것에 대한 대책은 식약청보다는 검찰이나 경찰 등 법 집행기관에서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약사회 관계자도 이번 조치의 실효성을 의심하며,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강력하게 대책을 촉구했던 고경화 의원의 한 측근은 "식약청이 마약을 추출할 수 있는 감기약을 사려면 적어도 500~600개의 약국을 돌아다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어떠한 실험도 해보지 않고 무슨 근거로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아쉬움을 털어냈다. 그는 "약국의 판매 제한 조치로는 미흡하며, 대체물질 개발을 통한 안전성 확보와 사용자에 대한 전산시스템 도입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구멍은 여전해
식약청의 기대와 달리 각 이해단체들의 분위기는 "이번 조치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통일된다. 결국 모두를 잡으려다, 다 놓친 꼴이 돼버렸다.
그러나 식약청의 조치는 제약 유통업계의 현실성을 배려한 측면이 크다. 고 의원이 주장하는 슈도에페드린 성분을 대체하는 페닐페프린이라는 성분은 이미 시중에도 나와 있다. 그러나 먹는 약이 아닌 바르거나 뿌리는 약이 대부분이다. 또 그동안 부작용 등 안전성 측면과 임상효과 측면에서 에페드린류 만한 약은 없었다는 게 제약
업계의 중론이다.
미국 역시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판매제한 조치로 삼고 있다. 미 의회는 2005년 슈도에페드린류 함유 감기약을 일반인이 구입할 시 신분증을 제시하고, 일정량(30일, 7.5g)을 제한하는 규제법안을 통과시켰다. 한국보다는 엄격하지만, 비슷한 내용으로 보아 식약청이 한국상황에 맞게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인다. 단, 미국은 슈도에페드린 성분 대신 페닐레프린 성분으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꾸준하다.
식약청 조치의 실효성 논란에는 의약분업예외지역과 불법 창구를 이용한 마약 성분이 함유된 감기약 구입 문제도 제기된다. 병원과 거리가 먼 벽지의 약국에서는 의약분업예외지역으로 인정, 의사의 처방전 없이도 약을 구입할 수 있다. 에페드린 성분의 복합제뿐만 아니라 단일제도 살 수 있다는 얘기다.
또 해외를 통한 불법 의약품 유통도 큰 문제다. 지난해에는 중국에서 마약 성분이 함유된 감기약을 들어온 일당이 검찰에 잡히기도 했다. 박재완 의원실에 따르면 온라인상에서 활동하는 불법의약품 쇼핑몰은 93개로, 여기선 시중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약을 살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유명 인터넷 쇼핑몰과 재래 시장 등지에서는 시중보다 50~60% 값싸게 약을 파는 것으로 나타났다.
누군가 범죄에 쓰려고 맘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약을 살 수 있는 환경이다. 이러한 유통구조 개선 없이는 이번 대책은 '하나마나'라는 주장이다.
식약청은 앞으로 이번 조치 의무이행을 위한 법적근거 마련을 위해 약사법 등 관계법령 개정작업을 추진, 한 두 달 내로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각계의 반응이 미온적이라 법령이 시행된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환영받을 수 있을지, 또 애초 목적인 감기약의 마약류 불법전용에 대한 효과도 두고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주간지 <월요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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