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이 만큼밖에 못해 줘 미안해"

중·고등학생인 두 딸의 학원마저 끊었습니다

등록 2007.06.13 11:15수정 2007.06.13 17:26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베란다에 설치 해 놓고 일을 하는 사시기계

베란다에 설치 해 놓고 일을 하는 사시기계 ⓒ 서미애

며칠만에 까만 보따리를 멘 산타 아저씨가 오셨다. 나는 집에서 니트 옷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시작한 섬유공장에서의 정포기술과 서울에 올라와서 배웠던 편물기술, 또 그 편물이 사양길로 접어들어 니트 옷을 만드는 사시 기술을 배웠다.


그러니까 나는 사시사인데.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예전부터 세 가지의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야만 어느 기술로라도 먹고 살 것만 같았다. 꼭 말이 씨가 된 격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또 다른 일을 찾아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한때는 베란다의 반이 가득 찰 정도로 많은 물건을 쌓아놓고 밤이 깊도록 정신없이 일을 한 적도 있었지만, 벌써 몇 년째 일이 줄어들고 있다. 경제 불황으로 그만큼 장사가 안 되는 탓도 있지만, 생산직의 일감들을 중국으로 많이 빼앗긴 탓도 있다. 요즘 거리에 나가 보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파는 옷들이 많다.

품질표시를 뒤져 보면 모두가 'made in china'다. 아무리 중국에서 만들어 온다 치더라도 재료값이 있고 운송비가 있을 텐데 어떻게 저리도 싼지 이해가 안 갈 때가 많다. 그러나 문제는 앞으로다. 몇 년 사이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의 인건비도 점점 올라가고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 이제는 공장들이 동남아로 이동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우리의 기술을 중국으로 동남아로 모두 전수해 주고 그들의 인건비가 자꾸 올라간다면, 우리는 결국 비싼 돈으로 수입을 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오지 않을까?

지금의 사시사들은 대부분 사십대 후반에서 오십대이다. 그 아래로는 배우는 사람들이 없다. 비록 집에서 사시기계만 돌리는 무지한 아줌마이긴 하지만 나는 이러한 우리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다. 힘든 일을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문제이고 이러한 일감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도 큰일이다. 공장은 점점 첨단화가 되어 인력이 많이 필요치 않은 시대가 온다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손으로 일을 해서 먹고 사는 우리들은 어찌 되는 건지.

내가 하는 사시일은 긴 바디 살에다 올을 하나하나 끼워 넣어야 하는 섬세한 작업이기 때문에 사람의 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르겠다. 세상은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니 기계에 집어넣으면 옷이 완성되어 똑 떨어지는 기계가 개발될지도. 그렇게 되면 나 같은 사람들은 또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할까? 3일에 겨우 2~3만원 어치의 일감을 내려놓고 가는 산타 아저씨는 오늘도 한숨을 쉬고 갔다.


사실은 그 아저씨의 한숨보다 내 한숨이 더 깊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중학교 3학년짜리 딸이 있다.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갈 때다. 중학생 학원비만도 35만원을 웃돌고 고등학생은 최소한 40만원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책값까지 포함하면 얼마인가. 여름방학 때면 또 특강프로그램을 집어넣어 안 하면 뒤처진다고 겁을 준다.

거기에다 학교 급식비, 교육비 등을 합치면 훌쩍 백만원이 웃도는 돈이다. 나는 그 돈을 댈 수가 없어 이미 1년 전에 작은딸은 학원을 끊었고 3개월 전에는, 고2짜리 딸도 학원을 끊고 말았다. 개인택시 운전을 하는 남편은 채 200만원도 못 번다. 거기에다 매달 들어가는 조합비를 평균 10만원 정도 내고 차 고치는 데만 한 달에 20여만원이 든다.


사람들은 차 고치는 돈보다 사는 게 낫다고 하지만, 마이너스 통장과 시댁과 친정 형제들의 친목계돈까지 다 꺼내 쓰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다. 거기에다 나의 일감마저 없어 거의 놀다시피 하니 매달 마이너스 통장으로 빚만 지고 있다.

1988년 400만원짜리 방에서 첫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것도 남편이 돈이 없어 예물을 하는 대신 방 얻는데 보태라 하여 100만원을 보태서 얻은 방이다. 절룩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피가 나도록 살았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남산만한 배를 이끌고 눈 내린 미끄러운 길을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담장을 붙들고 연탄재가 뿌려진 길로 살금살금 걸어 출근을 했었다.

100원짜리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도 참았다. 그때 당시 연탄공장에 다니던 남편의 월급이 25만원이었다. 내가 편물을 해서 한 달에 버는 돈이 20만원 내외. 그 돈으로도 악착같이 안 쓰고 적금과 계를 부어 돈을 조금씩 불려 나갔다. 아이를 낳으면 이 불편한 몸으로 애나 잘 키울 수 있으려나 걱정했지만, 나는 애를 키우면서도 또 우윳값 2~3만원을 벌기 위해 부업을 했다.

a 올을 끼워서 박으려고 준비해 놓은 상태의 사시기계

올을 끼워서 박으려고 준비해 놓은 상태의 사시기계 ⓒ 서미애

그러다가 아이가 20개월 되던 때, 근처에 사는 친구의 도움으로 지금의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단칸방에 중고기계를 하나 사들여 놓고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친구에게 배워 와서 집에서 연습을 하고, 그렇게 기술을 배웠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억척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열심히 사는 것이 뭐가 부끄러우랴.

아이는 하얀 실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도 혼자서 잘 놀아 주었다. 그러다가 아이의 손을 기계에 찧어 손톱이 시커멓게 멍들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정확하게 7년 8개월만에 17평짜리 아파트 5300여만원짜리를 1400만원 융자를 끼고 분양받았다. 그래도 나머지 빚은 지지 않았다. 자신에게 대견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작은 돈으로 알뜰히 모은 보람이었다. 그런데 함께 이사 온 사람들은 하나 둘 큰집으로 모두 떠나갔다. 그 사이 우리는 2/3 정도를 빚을 지고 개인택시를 샀다. 지금껏 열심히 살아온 것처럼만 하면 5년 안에 빚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파트 생활은 생활비도 더 많이 들고 아이들도 초등학생이 되어 피아노 학원 정도라도 보내고 하니 예상이 빗나갔다.

아이들은 커가고 집은 점점 좁다. 키가 부쩍 큰 아이들은 누우면 발이 장롱에 닿는다고 아우성이었다. 궁리 끝에 가구를 옮겨 주었더니 이제 발은 뻗을 수 있게 되었지만, 두 아이가 생활하기엔 숨이 막히는 방이다. 3년 전이었다.

의정부에 계약금 5%로만 넣고 중도금 전액 무이자라는 아파트를 하나 분양받았다. 그곳은 아파트 값이 형편없이 싼 곳이었다. 그래도 평수가 이 집의 두 배 가까이 되니 돈도 이 집 가격의 두 배였다. 빚만 지고 있는 우리로서 무리임에는 틀림 없었지만 허리띠를 더 졸라매고 열심히 해 보자고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조여도 더 조여지지 않은 허리띠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입주 날이 다가오면서 온갖 궁리를 다 해보아도 잔금 치를 일이 까마득했다. 분양금액에서 다운을 시켜 팔려고 내놓아도 보았다. 살 사람도 없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시댁에서나 친정에서는 난리가 났다. 남들이 장에 간다고 거름 지고 장에 가느냐고. 분수를 알고 살아야지 어떡할 거냐고, 특히나 친정 언니의 질책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서러웠다. 나는 왜 평생 17평에서만 살아야 하는 팔자냐고 참다못해 한마디를 해 버렸다.

a 촘촘한 바디살에 저렇게 한 올씩 올을 끼워 넣습니다. 제 꿈도 저렇게 촘촘히 끼울 수만 있다면.

촘촘한 바디살에 저렇게 한 올씩 올을 끼워 넣습니다. 제 꿈도 저렇게 촘촘히 끼울 수만 있다면. ⓒ 서미애

어찌어찌하여 이 집을 팔고, 옆집 아줌마에게 돈을 빌리고, 대출을 받고 해서 그 집은 월세로 놓고. 나도 이 집에서 그대로 전세로 살며 급한 불은 껐다. 대출 이자와 옆집 아줌마에게 드릴 이자는 월세와 그동안 이 집에 들어가던 대출 이자만큼만 보태니 해결되었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생활은 집을 사고 팔기 이전의 생활과 똑같다. 그러나 내가 살았던 형편이 늘 빠듯함의 연속이었으니 나의 일감마저 뚝 떨어진 그만큼의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서 아이들의 학원을 끊은 것이다. 집에서 교육방송으로 공부를 하라고 매일 같이 노래를 불러보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온다.

엄마 아빠가 여태껏 힘들게 살면서도 기초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그동안 열심히 해 주었으니 이제는 너희가 스스로 할 차례라고 누누이 이른다. 대학을 못 가도 할 수 없다. 이제는 더 해 줄 여력이 도저히 없다.

내가 못 배운 한이 많아 아이들에게 만큼은 최대한 다 해 주고 싶었는데 나의 한계가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이 서글프다. 아이들은 지금 자기네 방에서 무엇이 그리 좋은지 깔깔깔 웃고 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한숨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

덧붙이는 글 |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도 보냈습니다.

덧붙이는 글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도 보냈습니다.
#사시기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2. 2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3. 3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4. 4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5. 5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