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란 귀신(歸伸)의 중함을 알아야 돼"

[인터뷰] 자연을 사랑하는 농부 박문기씨

등록 2007.06.13 16:04수정 2007.06.1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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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땅의 가르침을 알고 살아가는 박문기씨

땅의 가르침을 알고 살아가는 박문기씨 ⓒ 정읍시민신문

영화에서 인간은 종종 바이러스에 비교되곤 한다. 모든 포유류는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감사하며 자연이 주는 만큼만 이용하며 살아가지만 인간은 서식지 주변의 모든 것들을 소모해 없애버린다는 것. 그리곤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해 이를 반복하는데, 이와 똑같은 것이 바로 바이러스라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라틴어로 '독'을 뜻한다. 자신이 자연의 '독'이라는 사실에 회유를 느끼고 자연을 아끼고 보살피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여 찾아가 봤다.

막바지 모내기가 한창이던 지난주 입암면 조도리에 도착해 만난 박문기(60)씨는 농약 몇 방울이면 모든 잡풀이 제거되고 낫질보다 몇 배는 편한 제초기가 있는 '현대문명'속에 살아가면서도 수십 년째 '아날로그 식' 유기농법을 고수해오고 있는 농부다.

새까만 피부의 박씨는 다소 왜소한 몸집에 비해 자신의 주관과 철학이 뚜렷하고 목소리 또한 힘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방 한 켠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마치 인생과 철학에 대한 강의를 듣는 자리 같았다.


박씨는 "지금 사람들은 귀신의 중함을 모른다"며 말문을 열었다. "귀신? 귀신이라면 처녀귀신이나 달걀귀신 같은 그런 것을 말하는 건가요?"라고 묻자 그저 허허 웃기만 한다. 잠시 뒤 웃음에 배어 나오는 인자한 주름을 바로한 뒤 차분히 설명에 들어갔다. "돌아갈 귀(歸)자와 펼 신(伸)자를 말하는 겁니다.

식물이라고 하는 게 자기 껍질과 잎을 양분삼아 자라는 것이 당연한데 요즘 사람들은 거기다 농약을 뿌린단 말이요. 그럼 그 원귀가 악귀가 돼 사람들에게 해를 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박 씨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동물은 동류를 잡아먹지 않아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헌데 미국 놈들은 소한테 소 피, 소뼈가 든 사료를 먹여 병이 난 것을 우리 국민들에게 먹이려고 한단 말이요"라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최근 한미 FTA 타결에 대한 불만을 말했다.

박씨의 말에 따르면 '유기농'이라는 단어는 신조어다. 그는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부터 귀신의 중함을 알고 논과 밭에 그대로 돌려주는 일을 해 왔는데 언제부턴가 농약을 뿌려대기 시작하고 그에 대한 부작용이 야기되자 그제서야 '유기농'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리와 우렁이 등을 이용한 친환경 농법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워낙 이름이 알려져 있어 국내 굴지의 식품업계에서도 주문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의 이런 성과에 인근 주민 11가구도 유기농법을 선택해 자연도 지키고 수익도 높아지는 결과가 발생했다고.

수십 년째 '아날로그 농법' 지켜오고 있는 심지 굳은 농부

박씨는 다섯 권의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맥이, 대동이, 본주, 숟가락, 한자는 우리글이다 등 자식과도 같은 책에 그의 모든 철학과 가치관이 담겨 있다. 그는 '한자는 우리글이다'라는 책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하며 "자주문자로 주장하기 위해선 발음하는 입 모양과 문자의 뜻이 같아야 한다"고 말했다. "'합할 합'자를 발음해 보세요.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정말 합해지죠? 하지만 중국은 '허'라고 발음 돼 입이 벌어집니다.


'출입'도 마찬가지예요. '출'하면 입이 나가고 '입'하면 들어오죠. 훈민정음에도 나와 있다시피 이를 통해 한자가 우리글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박씨는 또 다른 저서 '숟가락'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전 세계적으로 숟가락을 사용해 밥을 먹은 민족은 우리뿐입니다. 서양은 칼로 썬 다음 포크로 찍어먹었고 중국과 일본은 젓가락으로, 인도는 손으로 먹었어요. 우리나라에서 짐승 뼈로 만든 숟가락이 발견 됐는데 그 연대를 측정해 보니 8천 년 전의 것이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역사인 것이죠. 그런 숟가락 문화가 최근 들어 남의 것이면 다 좋은 줄 아는 몰지각한 사람들 때문에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리는 책입니다."

그저 다른 이들보다 자연을 조금 더 사랑해 유기농을 고집하는 농부이겠거니 생각했던 게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책에 대한 설명에서 평소 다양한 방면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박씨에겐 노후생활보장 보험 마냥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 바로 아버지의 뜻을 좇고자 뜨거운 여름 뙤약볕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큰 아들 박형용(31)씨. 명문 대학에 합격했을 정도로 명석했던 그는 아버지의 권유와 자신의 의지로 진학을 포기하고 농학을 공부, 이제는 완전한 아버지의 '동반자'가 되어 있었다. 이런 아들의 모습에 박씨는 생각만 해도 그저 흐뭇할 따름이다.

너무 바쁜 차에 찾아 간 터라 큰 아들에겐 변변한 질문조차 던지지 못했다. 대신 박씨에게 왜 큰 아들에게 농사를 권유하게 되었는지를 묻자 그 확고한 가치관만큼이나 명쾌한 대답을 들려줬다.

"농사꾼은 어떤 것이든지 이듬해에 쓸 종자는 잘 여문 놈으로 남겨두는 법이요. 종자의 종(種)자를 한 번 살펴보세요. 벼 화(禾)자와 무거울 중(重)자가 합해진 글자입니다. 대를 이을 종자는 잘 여물고 무거운 놈으로 남겨둬야 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큰 아들놈을 선택한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 것이죠."

박씨는 "하지만 농사를 짓고 있으니 장가 가기가 힘들다"고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박씨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아등바등 대는 요즘 부모들에 대한 쓴 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내가 똑똑한 자식에게 농사를 물려 준 것을 신기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요즘 부모들이 자식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는 그는 "요즘 부모들은 자식을 불한당을 못 만들어 안달들이 난 것 같다"고 말했다. "불한당이라는 것은 아니 불(不)에 땀 한(汗), 즉 땀을 흘리지 않는 놈이라 하여 옛날 어르신들이 하던 가장 심한 욕이었어요. 헌데 요즘엔 부모가 자식들을 어떻게든 땀 흘리지 않게 하려고 난리 아닙니까? 불한당을 만들려고 과외에 학원에… 과연 이 나라가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쯧쯧…."

a 명문대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땅을 지키고 있는 박형용씨

명문대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땅을 지키고 있는 박형용씨 ⓒ 정읍시민신문


"농사꾼은 가장 잘 여문놈을 종자로 남겨두는 법"

너무 정확한 그의 말에 허를 찔린 듯 온 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자식들 잘 되게 하려는 부모의 노력이 결국 불한당을 만들기 위한 발버둥이라니. 기자는 마치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그랬다. 그는 진정한 땀을 흘리고 있기에, 또 그 산물이 정직하게 보답해오기에 자신과 자식에 대한 속세의 시선에 도리어 쓴 소리를 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박씨는 세상의 아이러니에 마지막으로 일침을 가했다. "세상살이란 게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대해야 마땅해요. 나와 같기에 더욱 돕고 붙들어주는 것이 당연하단 말이요. 헌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게 안 돼." 그는 무슨 말인지 알겠냐는 듯 기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비록 농사를 짓는 사람일지라도 농민들의 입장을 대변할 줄 알고 우리 손이 닿지 못하는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추대해야 마땅한데 중요한 순간이 오면 오히려 무시한단 말이요. 막상 누군가를 뽑을 때가 되면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멸시하고 우리 삶에 대해 겪어보지도 않은 건달이나 정치꾼을 밀어준다 이 말입니다. 아 그러니 나라가 이 꼴 아니요."

박씨와의 인터뷰는 도올 선생의 강의를 듣는 것만큼이나 통쾌하고 짜릿했다. 인생이란 것에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의 확고한 가치관에서 비롯된 당당한 어조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채 서른이 되지 않은 기자를 전율케 하기 충분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다. 박씨가 자연 그대로 애지중지 키우는 농산물에 그의 올곧은 정신이 배어 있기에 인기가 많은 것은 아닌지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북정읍지역신문 '정읍시민신문'에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전북정읍지역신문 '정읍시민신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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