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고백이 된 국기에 대한 맹세

[주장] 진실한 마음의 소리는 강제될 수 없다...이젠 폐지돼야

등록 2007.06.14 11:30수정 2007.06.1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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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사랑방,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등 85개 인권사회단체들은 11일 오전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 폐지를 촉구하며 국기법 시행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오마이뉴스 안윤학


한때 열렬한 종교적 신앙 속에서 '내가 믿사오며'라는 고백을 할 때의 공포와 전율을 기억한다. 믿는다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면, 힘들게 입을 열어 고백하고 그 말을 따라 살 때 닥쳐올지 모르는 고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 살아가는 데 어떠한 문제도 느끼지 못한다면 별 문제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하는 말과 고백에 걸맞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한 마디 말을 뱉어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고백을 따르고 지키는 건 별도로 하고 입술만 딸싹거려 하는 일이 뭐 그리 어렵느냐고 한다면 종교적 고백의 진지함을 모르는 소치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아직도 계속되어야 하나

최근 국기법을 제정한 데 이어 그 시행령을 만들면서 그동안 이어져온 '국기에 대한 맹세' 문안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맹세문에 담긴 엄청난 의미에 대해서는 박정희 시대의 충성맹세문이라느니, 국가주의를 강요하는 것이라느니, 일제의 황국신민 서사를 연상시키느니 하는 등의 비판이 있어왔다. 필자도 몇 차례 이 국기에 대한 맹세의 문제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우선 이 맹세문의 문제는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궁극의 목표가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라는 데 있다. 조국과 민족의 명확한 개념에 대해서는 합의가 없지만, 이 막연한 목표를 위하여 과연 어느 누가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맹세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직업 자체가 몸과 마음을 바쳐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추구하는 데 상당한 관련이 있는 군인이나 공무원의 경우에 해당되는 사례가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모든 국민에게 할 것을 요구하는 이 맹세는 모든 국민에게 삶의 궁극적 가치이길 요구하고 있다. 수많은 가치 가운데 특정한, 아니 그 내용조차 불명확한 이 가치를 위하여 모든 국민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요구할 수 있는가?

진심으로 그렇게 맹세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에도 나름의 보람과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각기 다른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고 또 살아갈 수 있는 게 권리인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특정한 가치가 내 궁극의 가치이길 요구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아도 헌법에 어긋난다. 대다수 국민이 동의하는 무궁한 영광도 이와 조화될 수 없는 소수자에게는 결코 영광이 될 수 없다.

왜 어마어마한 종교적 고백을 요구하나

둘째,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의 경우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 것이다. 말 그대로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럴 각오 없이는 할 수 없는 고백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러한 맹세는 우리에게 진심으로 그럴 의사도 없으면서 입술만 움직여 어마어마한 고백을 하게 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거의 종교적 차원의 고백이라고 봐도 무방할 내용인데…. 더구나 하느님을 믿으면서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맹세한다면 조국과 민족의 영광이 하느님의 뜻 자체란 말인가?

셋째, 이렇게 입술로 하는 말 따로, 마음속의 본뜻 따로일 경우 이러한 맹세나 고백을 요구하고 또 자연스럽게 이러한 고백이 이뤄질 수 있다면 이것엔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일상화한다는 문제가 있다.

어느 누구인들 자기 자식에게, 또 학생에게, 친구에게 거짓말을 잘했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강력한 요구에 저항할 수 없어 입술로만 하는 고백일수록 더욱 자연스러운 거짓말을 요구하는 결과가 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몸과 마음을 바쳐 추구하는 대상이 분명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 아니고 또 이것과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맹세문에 아무런 저항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더욱 문제라고 생각한다. 거짓말에 둔감해졌음을 뜻하는 것이기에….

맹세문 수정안 등장했으나...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 논란을 빚자 5월 31일 행정자치부에서 맹세문 수정안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다음 세 가지 안이 제시되었다.

제1안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서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하여 국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제2안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사랑과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국민의 의무를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제3안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세 가지 안 모두 현재의 맹세문보다 순화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정안 역시 지금의 맹세문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첫째, 책임과 의무의 이행이 강하게 부각된다는 것이다. 수정안은 권리 행사가 부정적으로 인식된 전제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거나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공동체의 삶에서 권리 행사는 결코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적극적인 권리 행사를 통하여 공동체가 발전하고 인간의 삶의 질이 향상되어온 점을 애써 부인하려 하는 것은 아닐지. 과도한 권리의 행사나 남용이 경계되어야 하는 점은 옳지만, 권리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전제되어 만들어진 수정안은 아닌지 의문이다.

대한민국의 발전, 무궁한 영광, 번영은 무엇인가

둘째, 여전히 대한민국의 발전, 모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 조국의 통일과 번영이 최고는 아니지만 국가생활에서 매우 높은 가치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사실 매우 공허하고 그 내용에 대해 쉽게 합의가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충성을 다하고 책임과 의무를 다할 대상이 대한민국의 발전과 영광이거나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라지만, 그 내용은 동일한 사안을 두고도 의견이 극과 극으로 갈릴 수 있다.

이라크파병을 두고 '이건 대한민국 국력신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도 있지만, 오히려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결코 파병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지 않은가? 애매모호하고 내용이 무엇인지 말하기도 어려운 목표를 두고 언제까지 국민에게 입술만 움직이는 맹세를 요구할 것인가?

셋째, 수정안에 등장하는 사랑, 자유, 평등, 정의, 진실이라는 단어의 뜻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매우 숭고한 가치를 담고 있는 이들 개념을 사용하여 조국과 민족에 대한 맹세를 요구하는 것은 이 맹세문을 통하여 국가가 인간의 내면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는 것 아닌가?

순박한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조국과 민족을 대할 것이고, 약은 사람은 맹세를 하면서 숭고한 의미를 담고 있는 '사랑, 자유, 평등, 정의, 진실'이라는 단어의 뜻을 마음속에서 왜곡하게 될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매번 맹세문을 읊을 때마다 거짓말임을 의식하면서 하는 수밖에.

진실한 마음의 소리는 강제될 수 없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올바른 국가관은 필요하다. 함께 국가를 형성하여 살아가는 삶에서 국가란 무엇인가, 민족은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가,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은 어떠한 권리를 행사하고 국가는 인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구성원이 져야 할 책임과 의무는 무엇인가 등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기보다 인간으로서 권리를 강조하고 국가는 이러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아는 것은 우리의 역사적 경험으로 보아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것보다 더욱 절실한 과제다. 남용되지 않는 권리의 행사야말로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힘이며 진정으로 봉사하고 싶은 공동체를 만드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마음의 고백은 강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지한 양심의 소리는 스스로 울려나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소리가 강제되는 순간, 그 마음은 이제 왜곡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국기와 국가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의 어떤 수정안도 맹세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제 국기에 대한 맹세문은 폐지돼야 한다. 국민의 70%가 폐지에 반대한다는 조사도 있다지만, 이런 문제는 합의하여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양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송기춘 교수는 전북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송기춘 교수는 전북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극기 #국기 #맹세 #국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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