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되면 각시나방과 열애하겠지?

[포토에세이] 밤에만 피는 박꽃, 소복을 입은 그 여자가 생각나 슬퍼집니다

등록 2007.06.14 18:24수정 2007.06.14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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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복을 입은 듯 하얀색으로 밤에만 피어나는 박꽃을 보면 괜스레 슬퍼집니다. ⓒ 임윤수

소복처럼 하얀 꽃으로 밤에만 피어나는 박꽃을 보면 괜스레 슬퍼집니다. 깔끔하고 청아하다는 느낌보다는 왠지 사랑하는 사람을 앞세워 여읜 청상과부의 아픈 모습이 먼저 연상됩니다.

다른 꽃들이라면 훤한 대낮에 벌이나 나비를 불러 사랑놀이를 하고, 사랑놀이의 징표로 애를 밴 임신부처럼 불뚝한 열매를 맺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박꽃은 밤이 되어야만 꽃잎을 벌리고, 박각시나방을 맞아들여 은밀하게 수분을 한다니 음탕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수줍음이 많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박꽃을 보면 슬퍼집니다. 밤에만 피어나는 하얀색이라서 슬프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마음으로나마 청상으로 살아가느라 눈치꾸러기가 되었던 어느 여인처럼 해가 뜨면 시들시들 잎을 닫아버리니 슬퍼 보입니다. 먹을 게 없어 속을 파내 박속김치를 담가 먹던 배고픈 추억이 있기에 슬프고, 양식이 떨어질 때마다 보리를 꾸러 다니던 어머니 손에 들렸던 바가지가 생각나 슬퍼집니다.

하얀 박꽃 속을 들여다 봅니다. 들쳐진 치맛자락 속을 몰래 훔쳐보듯 조심스레 들여다 봅니다. 부드럽고 참 고운 속살입니다. 보송보송한 솜털에서 촉촉함이 배어납니다. 온몸으로 비벼오는 박각시나방의 몸짓을 부드럽게 맞아들이려는 듯 보들보들한 솜털이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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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들여다 본 꽃 속은 보송보송한 솜털이 촉촉합니다. ⓒ 임윤수

밤이 되면 박꽃이 피어나고, 움츠러들었던 꽃잎 사이로 각시나방이 들락거리면 수분이 이뤄질 것입니다. 교성 없는 뜨거움에 분비물 같은 꿀물을 내놓고, 몸부림의 흔적으로 박 덩이가 자라며 훌훌 속복을 벗듯 꽃잎조차 떨어질 겁니다.

처녀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앳된 계집아이처럼 꽃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몽우리도 맺혔습니다. 자잘한 귀밑머리처럼 솜털이 가득하고, 푸른 색깔도 벗지를 못했습니다. 아직은 연약해 보이는 넝쿨이고, 아직은 모자라는 꽃 몽우리지만 가을이 되면 함지박만 한 박 덩이가 달릴 넝쿨입니다.

연약하지만 박을 지탱하는 원천, 넝쿨손

배배 꼬였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잔뜩 움켜잡은 모습은 차라리 처절해 보입니다. 수염처럼 가느다랗고, 새싹처럼 가냘프게만 보이는 넝쿨손들은 닿는 것마다 비비 꼬거나 휘감아 돌렸습니다. 생존하기 위한 수단이며 커 나가기 위한 방편인지 모르지만 연약해 보이기만 하는 넝쿨손들이 이리 뻗어 휘감고, 저리 뻗어 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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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라고 하기엔 아직 앳된 몽우리도 있었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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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해 보이지만 넝쿨손들은 쭉쭉 뻗었습니다. ⓒ 임윤수

넝쿨손들 중에는 하릴없이 곧게 뻗어나간 곳도 있지만, 감개나 타래에 감긴 실처럼 휘감기만한 곳도 있고, 용수철처럼 뱅글뱅글 말아가며 늘어진 곳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 가지를 늘려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 뭔가에 의해 잡아 당겨질 때 무리 없이 늘어나거나 당겨지는 충격을 감소시키기 위한 듯 넝쿨손들은 일찌감치 자신을 스스로 꼬거나 접어 에누리를 만드는 지혜를 보였습니다.

넝쿨손들이 이렇듯 용수철처럼 늘어날 수 있는 부분을 형성하지 않거나, 처음부터 팽팽하게 잡아당기고만 있다면 불어오는 바람, 늘어나는 무게를 견디지 못해 끊어졌거나 망가졌을 게 분명합니다.

넝쿨손들이 끊어지면 의지하고 있던 넝쿨들이 뒤집히거나 미끄러지고, 넝쿨에 달렸던 박 덩이 역시 나뒹굴거나 내동댕이쳐지며 상처를 입거나 깨질 텐데 이렇듯 넝쿨손들이 용수철처럼 작용해 줘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하게 잡아주니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보여주는 생존의 섭리며 지혜입니다.

쭉쭉 뻗은 넝쿨손 중에는 똬리를 틀듯 휘휘 나뭇가지를 휘감은 것도 있고, 아름으로 돌덩이를 끌어안은 듯 감싸 안은 것도 있습니다. 초가지붕처럼 푹신푹신하고 비스듬한 곳이라면 엉성하거나 느슨하게 뻗어 있지만 절벽 같은 담벼락, 아슬아슬한 낭떠러지라면 팽팽하게 매달려 있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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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아야겠다는 듯 칭칭 감았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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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넝쿨이 견딜 수 있고, 박 덩이가 떨어지지 않는 원천입니다. ⓒ 임윤수

복잡하게 엉켜 있지만 연약해 보이기만 한 넝쿨에 달린 커다란 박 덩이를 볼 때마다 조마조마했었습니다. 널찍한 잎사귀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고, 줄기들이 얼기설기 엮여 있어 언뜻 보기엔 튼튼해 보이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힘을 쓸 만한 딱딱한 줄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휘휘 구부리는 대로 구부러지고, 둘둘 마는 대로 말리는 연약한 줄기들뿐인 게 박 넝쿨입니다. 그렇게 줄기뿐인 넝쿨에 한 아름은 될 것 같은 커다란 박 덩이가 주렁주렁 달렸던 것을 보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금방이라도 '툭'하고 떨어질 것 같아 조마조마했었습니다.

'휙'하고 바람이 불면 넝쿨째 훌렁 뒤집힐 것 같고, 소나기라도 오면 그 물줄기에 포기 째 떠내려갈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불고, 소나기가 쏟아져도 어렸을 때부터 지금껏 보아온 박 넝쿨들은 끄떡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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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한 넝쿨손이지만 용수철처럼 에누리를 두고 있기에 이런 박 덩어리도 매달릴 수 있을 겁니다. ⓒ 임윤수

위험해 보이고, 가냘프게 보이지만 박 넝쿨이 뒤집히지 않고 떠내려가지 않으며 커다란 박 덩이를 달고 있을 수 있었던 건 넝쿨에 가리고, 이파리에 감춰졌던 넝쿨손 때문일 겁니다.

그런 박 넝쿨손을 보며 부드러움 속에 강함, 휘어짐 속에 여유가 있음을 배우는 중입니다. 밤에만 피어나는 박꽃은 슬픈 추억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살아가는 방편과 지혜도 보여줍니다.
#박꽃 #넝쿨손 #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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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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