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스펙트럼 장관이 펼쳐지는 르완다

[내가 만난 아프리카 32] 빼앗긴 아프리카 이름 되찾아주기

등록 2007.06.17 16:33수정 2007.06.17 21:12
0
원고료로 응원
a

우간다의 부나가나 국경에서 나와 함께 찍은 뉴질랜드 여행객 로렌스 스미스 ⓒ 김성호

콩고에서 마운틴고릴라를 구경하고 돌아온 우리는 우간다 키소로에서 하루를 더 묵은 다음날 아침 다시 배낭을 메고 각자의 여행지로 떠나야 했다. 나와 함께 케냐 나이로비에서 우간다, 콩고의 마운틴고릴라까지 보러왔던 로렌스는 우간다 캄팔라를 거쳐 케냐 나이로비로 돌아가기 위해 첫 버스를 타고 떠났다.

일주일 동안 같은 방에서 자고 동고동락하는 사이 우리는 정이 많이 들었다. 말이 별로 없지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컸던 로렌스는 국적을 떠나 나에게 좋은 여행의 동반자였다. 우리는 여행기간과 끝난 이후에도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자신이 찍은 사진을 교환하는 등 지금도 우정을 나누고 있다.

숙소를 나오자 앞에 버티고 있는 큰 봉우리의 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음가힝가(Mgahinga) 고릴라 국립공원 안의 무하부라 산과 가힝가 산이다. 우간다의 마운틴고릴라가 있는 지역으로 화산지대여서 평소에는 안개가 짙게 깔려 있는데, 오늘은 화창한 날씨에 그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나는 가디(Gadi)라는 젊은 숙소 직원에게 르완다 국경으로 가는 교통편을 물었다.

"르완다 시아니카 국경으로 가는 버스는 몇 시에 출발하느냐?"
"국경 가는 버스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국경을 가야 하나."
"내 오토바이 타고 가면 된다."

나는 수도 캄팔라에서 봤던 오토바이 보다보다를 타게 되었다. 덜컹덜컹 거리는 비포장도로를 가디가 모는 오토바이 뒤에 타고 달려 오전 9시 30분께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14km 거리여서 30여분 정도 걸렸다. 어깨에 배낭까지 메고 비포장도로를 오토바이 보다보다를 타고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경과 국경을 태워주는 보다보다(Boda-boda)의 어원처럼 우간다와 르완다, 콩고민주공화국 사이의 여행객이 별로 없는 험한 국경에는 오토바이 보다보다 이외에는 달리 교통수단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

루헨게리 주변의 작은 언덕 ⓒ 황정일

'아프리카의 스위스'라 불리는 르완다

우간다 키소로에서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로 가는 육로는 두 가지. 옛 반군들의 활동지역으로 치안이 불안한 시아니카(Cyanika) 국경을 바로 통과하는 방법과 카발레로 되돌아갔다가 가투나(Gatuna) 국경을 통과하는 방법이다. 시아니카는 가깝지만 불안하다는 점이 단점이고, 가투나는 안전하지만 멀리 되돌아가야 한다는 게 단점이다.

나는 약간 위험이 있더라도 직접 시아니카를 통과해 루헨게리를 거쳐 키갈리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무엇보다도 전날 왔던 카발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낭여행객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듯이 온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 법. 어렵고 힘들더라도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 배낭여행의 묘미이다.

시아니카 국경의 수속은 간단했다. 미국 돈 60달러를 내자 르완다 여행 비자가 바로 나왔다. 시아니카 국경이 위험하다고 알려져 유럽 여행객들이 대부분 카발레를 거쳐 가투나 국경으로 가는 길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국 여행객들은 나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수속을 마치는데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쓰고 남은 우간다 화폐를 르완다 화폐로 바꾸었다. 미국 돈 1달러는 우간다실링으로 1900원이었고, 르완다프랑으로는 580원이었다. 1르완다프랑은 3우간다실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르완다 국경으로 넘어가자 루헨게리까지 가는 미니버스가 있어 바로 올라탔다. 루헨게리까지 가는 버스요금은 400르완다프랑이었다. 르완다의 버스는 다른 아프리카 버스와 달리 승객이 찰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승객이 70~80%밖에 차지 않았는데도 바로 출발시간에 떠났다.

우간다 쪽과 달리 도로가 국경에서부터 루헨게리까지 아스팔트로 멋지게 깔려 있었다. 루헨게리에서 키갈리로 가는 도로 역시 마찬가지로 잘 포장되어 있었다. 르완다 대학살 이후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원조를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시설(SOC)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고 한다.

내 옆에는 아기를 등에 업은 젊은 아주머니가 탔다. 아이가 엄마의 등과 좌석 뒷받침 사이에 끼어서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기를 앞으로 돌려서 애기보를 풀어주자 금세 환하게 방긋 웃는다. 엄마 젖을 물리자 아기의 표정이 갑자기 싱숭생숭이다.

아기 엄마는 100프랑 지폐를 머리를 두른 스카프 끝에 돌돌 말아서 다시 묶었다. 꼬깃꼬깃 손때가 묻은 100프랑을 보물 숨기듯 스카프에 보관하는 것이었다. 스카프가 돈 주머니 역할을 하고 있었다.

르완다의 모습은 '아프리카의 스위스' 또는 '천 개 언덕의 나라'라는 말이 실감나게 아름다웠다. 루헨게리와 키갈리로 오는 동안 크고 작은 수많은 언덕을 넘고 또 넘어야 했다. 불레라 호수와 루혼도 호수 등 수많은 호수들이 산 계곡에 푸른 물을 머금고 있었다.

도로 옆에는 바나나와 채소, 닭 등을 파는 거리시장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르완다는 온통 푸른 산과 호수로 둘러싸인 언덕의 나라이다. 구름 위의 푸른 하늘을 달리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시아니카에서 루헨게리로 오는 길은 마운틴고릴라가 사는 르완다 쪽의 볼캉(Volcan. 화산)국립공원의 산허리 밑을 끼고서 달려가는 것이다.

a

동아프리카 대지구대의 동부지구대와 서부지구대 ⓒ 위키피디아

초록의 스펙트럼이 여행객의 눈을 사로잡다

르완다 역시 우간다와 같이 적도지대이지만 해발 1500m 이상의 고원지대여서 쾌적한 날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늘 봄 같은 푸른 세상은 녹색의 나라 우간다에서 초록의 나라 르완다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우간다에서 르완다에 이르는 고원지대는 단층계곡과 화산대, 호수로 이뤄지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요르단에서 홍해를 거쳐 에티오피아의 아비시니아 고원을 거치면서 다시 2개의 지구대로 나눠진다. 동부지구대는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와 케냐 산을 거쳐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 산과 마니아라 호수, 말라위의 말라위 호수를 거쳐 모잠비크로 이어진다. 서부지구대는 우간다와 콩고민주공화국 국경의 앨버트 호수와 비룽가 산맥, 콩고와 우간다의 키부 호수, 탄자니아와 콩고, 부룬디의 탕가니카 호수를 거쳐 말라위의 말라위 호수로 연결된다.

우간다와 탄자니아, 케냐에 걸쳐 있는 빅토리아 호수는 동부 지구대와 서부 지구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은 이 두 지구대의 호수를 따라 화산활동이 일어남으로써 높은 산과 호수들이 생겨난 것이다.

우간다에서부터 비룽가 산맥과 키부 호수를 거쳐 르완다 키갈리로 가는 나의 여정은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서부지구대를 따라 내려오는 것이다. 서부지구대에 이어 탄자니아의 응고롱고로 분화구와 올두바이 계곡, 킬리만자로 산에서 동부 지구대와 다시 만나 말라위의 말라위 호수로 가게 된다.

a

루헨게리에서 키갈리로 가는 산 ⓒ 모대곤

우간다에서 르완다에 이르는 동아프리카 대지구대의 서부지구대를 따라 생성된 호수 길은 아프리카 여행 중에서도 초록의 스펙트럼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호숫가에 가까운 짙은 녹색의 나뭇잎에서 산 위로 올라갈수록 옅어지는 푸른 나뭇잎과, 안개와 구름이 끼면서 어두운 녹색으로 변하던 나뭇잎들은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면 밝은 하늘색으로 카멜레온처럼 색깔이 변한다.

짙은 녹색과 초록, 청록, 푸른색, 하늘색의 갖가지 색깔을 갖고 있는 우간다와 르완다의 산과 강은 말 그대로 초록의 스펙트럼의 전시장이었다.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빨주노초파남보의 7가지 무지개색이 나오듯이 아프리카 고원지대의 푸름은 여행객의 눈으로 빨려 들어오면서 다양한 초록의 스펙트럼이 펼쳐졌다.

국경을 떠난 미니버스는 40여분 만에 루헨게리에 도착했다. 수도 키갈리로 가는 길을 몰라 방황하자 같은 버스에 타고 왔던 30대 중반의 여인이 친절히 도와준다. 키갈리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나를 데려가서 버스표까지 끊어주었다.

루헨게리는 볼캉 국립공원 기슭에 자리 잡은 아주 작은 도시였다. 마운틴고릴라의 어머니인 다이안 포시가 살았던 밀림이고, 지금도 전 세계에서 야생 마운틴고릴라를 보러 오는 여행객들의 전초기지이다. 건너편은 바로 콩고민주공화국의 비룽가 국립공원이다.

a

루헨게리 버스터미널 부근 ⓒ 황정일

빼앗긴 아프리카 이름을 찾아주자

똑같은 '화산' 국립공원이라는 뜻인데 콩고는 스와힐리어로 화산을 뜻하는 비룽가 국립공원이라 부르고, 르완다는 아직도 프랑스어로 화산이란 뜻의 볼캉 국립공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는 마운틴고릴라가 사는 화산지대를 접하고 있는 르완다와 콩고, 우간다 3개국이 이름을 통일해 비룽가 국립공원이라고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리카 지명으로 비룽가라는 이름이 얼마나 친근감이 있는가. 영어 이름의 빅토리아 호가 어색하듯이 프랑스어인 볼캉 국립공원도 어울리지 않는 제국주의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호를 발견한 영국의 탐험가 존 해닝 스피크만 현지인들이 '니안자 호'라고 부르던 멀쩡한 호수에다 영국 여왕인 빅토리아의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다. 서구 유럽의 탐험가들은 현지인들이 부르던 이름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국왕 이름이나 여왕의 남편, 황태자, 탐험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단체의 우두머리 이름 등을 마구 붙였다.

오만의 극치는 역시 어용탐험가인 미국의 헨리 스탠리였다. 스탠리는 1879년 레오폴드 2세의 재정지원으로 콩고를 다시 탐험하면서 킨샤사를 레오폴드빌이라고 붙이고, 키상가니는 아예 자신의 이름을 딴 스탠리빌이라고 불렀다. 콩고의 비룽가 국립공원도 그동안 벨기에의 왕자였던, 지금은 벨기에 국왕인 알베르 2세의 이름을 따서 알베르(Albert) 국립공원으로 불리다가 지난 1969년에야 현재의 이름인 비룽가로 바뀌었다.

개인의 정체성이 자신의 이름에서부터 시작되듯이 나라의 정체성도 말과 글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창씨개명이 아예 조선의 정체성을 없애기 위한 민족말살정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아프리카 종단여행 동안 곳곳에 영어와 프랑스어 등 식민지배 국가의 지명이 남아있는 것을 많이 보았다.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제국주의적 언어를 통해서 식민주의의 흔적이 얼마나 오래가는지를 볼 수 있었다.

a

기린과 말, 얼룩말을 혼합한 오카피 동물의 모습 ⓒ 위키피디아

물론 일부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식민주의가 빼앗은 이름들을 아프리카 고유의 이름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콩고에서 알베르 국립공원을 비룽가 국립공원으로 바꾸고, 오스트리아 황태자 이름을 따서 붙였던 케냐의 루돌프 호수를 투르카나 호수로 변경하고, 우간다의 머치슨 폭포를 카발레가(Kabalega) 폭포로, 남아공의 이스턴트랜스발의 영어식 지명 이름을 음푸말랑가로 바꾼 것이 대표적이다.

식민지 청산은 언어의 독립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가 봄베이를 뭄바이로, 캘커타를 콜카타로 바꾸듯이. 우리가 5천 동안 사용해오던 동해라는 이름을 일본이 강점기 때 멋대로 일본해로 바꾼 것을 원상회복하려는 운동은 단순한 표기 변동이 아니라 식민지 잔재 청산의 하나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간다와 케냐, 탄자니아의 빅토리아 호수가 식민지 시대 이름 그대로 불리고 있고, 빅토리아 여왕의 작고한 남편 이름을 따서 붙인 우간다의 앨버트 호, 왕자 이름인 에드워드 호, 현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딴 퀸엘리자베스 국립공원도 바뀌지 않고 있다. 잠비아와 짐바브웨의 빅토리아 폭포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빅토리아 호수도 애초 현지인들이 불렀던 니안자(Nyanza) 폭포로 바꾸고, 빅토리아 폭포 역시 현지인들이 '포효하는 연기'라는 뜻으로 불렀던 모시오아 투니아(Mosioa Tunya) 폭포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영어식 이름보다는 아프리카 고유의 이름이 나에게 훨씬 정감 있게 다가온 것은 식민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까. 아프리카 이름 되찾기 운동을 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

오카피 호텔에서 내려다본 키갈리 모습. 두번째 건물이 르완다 국세청 ⓒ 김성호

언덕 위의 도시 키갈리

볼캉 국립공원을 뒤로하고 오전 10시 떠난 미니버스는 2시간 정도 달려 수도 키갈리에 도착했다. 역시 잘 포장된 도로가 시원하고, 수많은 작은 언덕들을 넘고 푸른 나무들이 자라는 고원지대를 달리는 느낌은 마치 안나푸르나 봉으로 가는 네팔의 포카라 지역과 같았다.

산등성이에 위치한 키갈리는 우간다 수도 캄팔라보다는 작지만 전망이 멋진 도시였다. 키갈리 중심부에서 내려다보면 아래로 계곡을 따라 푸른 나무 사이로 수많은 집들과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건물들도 깨끗하고 집집마다 정원수 같은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배낭을 메고 걸어서 숙소를 찾아 올라가는데 둥근 광장이 나타났다. 국민통합광장(Place de I'Unité Nationale)이었다. 대량학살을 자행한 후투족 정권을 몰아낸 7월 4일을 해방의 날이라 기념하면서 평화와 국민통합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광장이다.

국민통합광장을 끼고 왼쪽으로 언덕길을 올라가니 내가 찾는 오카피라는 호텔의 여행객 숙소가 나타났다. 기린과 말, 얼룩말을 혼합한 동물인 콩고의 오카피 이름을 딴 호텔이다.

키갈리가 언덕 위의 도시인데다 오카피 호텔은 더욱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해 밑으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숙소 아래로는 르완다 국세청도 보였다. 수도 키갈리는 캄팔라와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도시였다. 캄팔라보다 훨씬 작지만 훨씬 더 안전하고 깨끗했다.

르완다는 에티오피아나 케냐, 우간다, 콩고민주공화국과 확실히 달랐다. 자연이 '아프리카의 스위스'라면, 시민의식은 '아프리카의 프랑스'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르완다는 버스터미널에서 호객꾼이 거의 없고, 대중버스도 정해진 시각에 맞춰 떠나며, 정원을 초과해 승객을 태우지도 않고, 도로도 잘 포장되어 있었다. 옛 대량학살의 흔적은 기념관이 아니고서는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조용한 나라였다.

무엇보다도 르완다 주민들의 시민의식은 놀라웠다. 이른바 선진국 수준의 시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외국인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을 남의 일처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국가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으로 생각해 적극적으로 말리기도 한다.

키갈리에서 하루를 묵은 뒤 다음날 탄자니아로 가는 봉고버스 안에서 내가 생수 값으로 500프랑을 냈으나 생수를 파는 젊은이가 200프랑밖에 거슬러주지 않자 옆에 있던 60대 할아버지가 그 젊은이에게 호통을 쳤다.

생수 값은 200프랑이어서 300프랑을 거슬러줘야 하는데 100프랑을 적게 돌려줬다고 혼을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산 생수는 상표가 '나일수원(Source Du Nile)'으로, 실제 가격이 300프랑이어서 젊은이가 바가지를 씌운 것이 아니었다.

승객들도 버스 안에서 조용하고 공중의식이 철저했다. 차 안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옷도 깨끗하고 말끔했다. 중간에 차가 정차한 뒤에도 바로 다시 출발했다.

a

수도 키갈리 언덕위의 건물 ⓒ 김성호

르완다 경찰을 통해 희망을 본다

무엇보다도 경찰관의 옷차림과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도로의 경찰관들은 '르완다경찰(Rwanda Police)'이라고 쓰인 밝은 하늘색 점퍼를 말끔히 입고 있었다. 검문하는 자세도 위압적이지 않고 절도가 있었다. 경찰관들도 하나같이 나이가 젊은 엘리트였고, 돈을 받는 경찰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경찰의 태도를 보면 그 나라 공무원의 부패지수와 행정체계의 효율성을 알 수 있는데, 르완다는 놀랄 정도로 모범적인 국가였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 일부 국가에서 여전히 차량운전자들로부터 돈을 받는 교통경찰들을 목격했다. 젊고 청렴한 엘리트 경찰들을 보면서 르완다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일선 행정도 시민의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모습이 느껴졌다. 도로포장 공사를 하는데, 먼지나 나지 않도록 물차가 물을 뿌리고 있었다. 먼지를 흠뻑 뒤집어써야 했던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놀랄 정도의 차이이다. 르완다는 대학살 이후 외국의 원조가 많이 들어왔는데,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SOC)에 잘 투자하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르완다는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로 유명하기도 하다. 국제의회연맹(IPU)이 발표한 2006년도 여성의원 비율에 따르면 르완다가 48.8%로 가장 높고, 그 다음이 스웨덴 47.8%이고, 한국은 13.4%로 세계 80위를 기록했다.

르완다는 수도인 키갈리를 '아프리카의 두바이'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다. 아프리카 무역과 산업의 중심지로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도로 등 기간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경찰 등 공무원들의 태도와 자질, 발달된 시민의식, 외국인에 개방된 자세, 여성인력의 정치적 활용 등을 보면서 르완다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주민들의 은은한 미소와 여유를 통해서도 르완다의 희망을 보았다. 키갈리 시민들은 쫓기거나 서두르지 않았고 시골 주민들의 얼굴도 평온했다. 언젠가 내가 다시 찾았을 때 아프리카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함께 달성한 르완다 모습을 상상하니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르완다 #키소로 #시아니카 #루헨게리 #키갈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봉 천만원 올려도 일할 사람이 없어요", 산단의 그림자
  2. 2 은퇴 후 돈 걱정 없는 사람, 고작 이 정도입니다
  3. 3 구강성교 처벌하던 나라의 대반전
  4. 4 [단독] "문재인 전 대통령과 엮으려는 시도 있었다"
  5. 5 내 차 박은 덤프트럭... 운전자 보고 깜짝 놀란 이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