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16회

등록 2007.06.18 08:30수정 2007.06.1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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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표정변화에 인후는 쾌재를 불렀다. 영문이야 어쨌든 상대의 감정을 흩트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남궁정이 발바닥을 끌 듯 자신에게 미끄러지듯 조금씩 다가오자 그는 더욱 약을 올리려는 듯 경멸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허나 남궁정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예사롭지 않은 살기에 그는 허리춤에 감았던 면도(緬刀)를 뽑아들었다. 허리띠처럼 감겨져 있었던 면도는 폭이 좁고 매우 얇은 것이어서 연검보다도 더 하늘거리는 것 같았다.


“흐흐… 감히 나설 곳도 가리지 못하고 천방지축 날뛰는 네놈의 버릇을 천천히 뜯어 고쳐주마.”

인후는 아주 느긋한 태도를 보였는데 그것이 상대를 정확히 모르고 한 그의 세 가지 실수 중 하나였다. 남궁정은 후레자식이란 욕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는 본래 후레자식이었으며 자라오면서 수없이 들었던 욕이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익히기 어렵다는 할아버지가 던져준 일초(一招)의 검식이 완성되었을 때 이후로는 그런 말을 하는 인간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사람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런 욕을 입에 담은 자는 그 욕으로 인해 더 이상 숨쉬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인후가 보여준 경멸스런 눈빛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부친과 그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던지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그 역시 그 검초가 완성됨으로 인해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그런 눈빛에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실수는 남궁정을 모르면서 선공의 기회를 준 것이었다. 아마 인후가 남궁정이란 인간을 알았다면, 또한 남궁정이 익힌 검초가 무엇인지, 어떠한 것인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남궁정에게 선공을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실수로 인해 후회할 기회조차 더 이상 가지지 못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남궁정은 미끄러지듯 천천히 다가서던 움직임에서 갑작스럽게 그의 삼장 앞에서 전면이 훤히 빈 상태인 두 손으로 연검을 쥐고 오른쪽 허리 아래로 늘어뜨린 채 마치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돌진해왔던 것이다.

헌데 짧은 거리에서의 남궁정의 움직임은 인후나 다른 사람들이 예상했던 움직임보다 훨씬 빨랐다. 그저 빠른 것이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빨랐고,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미친 놈…!’

저 자식이 정말 정신이 있는 작자인가? 온통 허점을 드러내고 무작정 달려드는 저 작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나 맹렬히 달려드는 속도에 놀라기는 했지만 인후는 본능적인 반응으로 급히 면도를 앞으로 뻗어 남궁정의 왼쪽 가슴을 찔러갔다. 상대의 심장을 노린 그 동작은 상대를 공격하는 목적보다는 달려드는 남궁정의 기세를 일단 저지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슈우욱---! 푹--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인후의 면도는 남궁정의 심장을 약간 비껴나갔지만 너무나도 쉽게 남궁정의 아래쪽 가슴을 파고들었고, 살을 파고드는 면도의 느낌에 만족감과 함께 너무나 쉽게 성공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눈에 그 순간 남궁정의 연검이 치켜올려진다고 비치는가 싶더니 보는 사람의 눈을 잠시 마비시키는 백광(白光)이 장내를 폭발하듯 터졌던 것이다.

번쩍----!

그리고는 모든 동작이 멈췄다. 어찌된 일일까? 여전히 인후의 면도는 남궁정의 아래쪽 가슴에 박혀있었고, 조금씩 핏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만약 인후가 약간 손목을 비틀어 사각으로 올려버리면 남궁정의 심장은 두 조각이 날 터였고, 인후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

하지만 인후는 그러지 않고 있었다. 그저 동작이 정지된 채 상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남궁정 역시 시선을 인후에게 던진 채 멈춰있었는데 달려들 때와 같이 오른쪽 허리 아래로 늘어진 그의 연검 끝에는 살짝 한 방울의 핏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좌중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몇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

숨 막힐 듯한 시간이 잠시 흐르고 먼저 움직인 것은 남궁정이었다. 그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더니 자신의 가슴 아래 파고든 인후의 면도의 날을 맨손으로 쥐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가슴에서 뽑아내고 있었는데 그의 손아귀 안에서 면도가 종이장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허억----!”

그리고 좌중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성이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인후의 이마 한복판에 갑자기 한줄기 새빨간 선이 그어졌다. 뒤로 빗어 넘긴 앞머리부터 시작된 선이었는데 핏방울이 배어나오며 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또 빨간 선을 따라 또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는데 이마에서 시작된 새빨간 선은 미간을 지나 콧대와 인중, 그리고 입술을 지나며 아래로 그어지기 시작해 아래턱과 목줄기를 지나 가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처음에는 아주 가느다란 선이었지만 그것은 점점 선의 굵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더 굵어졌고 결국에 인후의 머리통은 갑자기 처음 붉은 선이 나타나기 시작한 그곳으로부터 쩍 벌어지기 시작했다.

곧 이어 아래로 갈라지기 시작하여 붉은 선이 나타난 그곳으로부터 입술과 목줄기, 그리고 결국 몸뚱이까지 한복판에서 정확하게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몸통의 반은 왼쪽으로, 또 다른 쪽의 반은 오른쪽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쿵쿵--!

선혈이 갑자기 양쪽에서 뿜어졌기 때문에 자욱한 피보라가 이는 듯 했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산 채로 두 쪽이 난 것이다. 이러한 참혹한 광경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장내를 휩쓸고 지나가는 듯 했다.

챙그랑---

남궁정의 가슴 아래를 파고들었던 인후의 면도가 형편없이 구겨진 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지금 일순간에 일어난 일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아마 직접 보지 못하고 누군가의 말을 들었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남궁정은 여전히 피가 가슴 아래에서 배어 나오고 있음에도 지혈시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약간은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는데, 그는 연검에 묻은 피를 손으로 훑어 닦아낸 후에 고개를 돌려 놀란 표정이 가시지 않는 장문위를 바라보았다. 아마 장문위의 공표를 재촉하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남궁공자의 승리입니다. 이의를 제기하실 분이 계십니까?”

아직 놀란 표정이 가시지 않은 장문위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그리고 좌중을 쭉 훑었다. 장문위의 말에 좌중 역시 큰 추격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모습들이었다. 뻔히 두 눈으로 본 사람이라면 누가 이의를 제기할까?

하지만 모든 시선은 남궁정에게로 쏠려있었다. 남궁정은 그제야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좌등 쪽으로 두 발짝 다가서더니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어른의 위명에 누를 끼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좌등의 얼굴 표정은 아주 묘했다. 대견한 듯한 표정과 어이없다는 표정이 교차되고 있었다.

“남궁공자는 아주 대단한 검일 뿐 아니라 아주 위험한 검을 익히고 있구려.”

‘수고했다’라든지 ‘고맙다’는 말이 아니었다. 칭찬인지 비난인지도 모를 말이었다. 그만큼 남궁정의 검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엔 너무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이었다.

“위험하도록 키워졌으니까요….”

사연이 있을 것이다. 저 청년의 가슴에는 무수한 상처가 있을 것이다. 좌등은 직감적으로 그 아픔이 느껴졌다.

“공자의 상처가 아물면 술 한 잔 나누고 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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