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2년 복역을 마치고, 1980년 1월 광주교도소 문을 나서고 있다.한길사
리영희 교수에 대한 구속기소 및 백낙청 교수에 대한 불구속기소는 지식인사회로부터 잇단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12월 8일 성명을 발표하고 "일방적이고도 왜곡된 시각만을 강요해오던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국제적 시야를 넓혀준 용기 있고 양식 있는 언론인" 리영희 교수를 구속하는 것은 "양심적인 지식인에 대한 탄압"이라고 규정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77 인권선언'에서 "언론의 위축상태가 이제 출판계에까지 확대되어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구속되고 창작과 비평사, 한길사 등 양심적인 출판사의 대표들이 입건"되었음을 지적, "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는 것임을 믿고 모든 양심적인 지식인, 고난 받는 근로자, 시민, 학생들과 더불어 끝까지 분투할 것을 다짐한다"고 선언했다.
12월 16일에는 김동길·김용준·김찬국·노명식·안병무·이계준·한완상·김병걸·김윤수·남성길·성내운·염무웅·이우정 교수 등 해직교수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활동의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학문의 연구는 오직 진리의 탐구만을 목적으로 하는바, 이는 결코 어떤 일개 정파나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될 수 없으며, 학문적 오류는 순수한 이론적 비판에 의해서만 수정 극복될 수 있다. 따라서 연구자의 인신에 대한 구속과 입건은 연구와 저술활동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며, 나아가 학문의 존립 근거 자체를 말살하려는 처사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강단과 연구실에서 쫓겨난 교수에게 자유로운 발표와 저술의 기회마저 봉쇄한다면, 그것은 바로 한 개인의 생존권에 대한 탄압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어 학계·언론계·문단의 인사 82명이 검찰총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했다.
"리영희씨는 조선일보사와 합동통신사에 재직하는 동안 그의 냉철한 보도정신이 높이 평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 논평, 해설, 혹은 외국문헌의 번역을 통하여 변전하는 국내외 정세를 분석하는 일에서 많은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받아왔습니다. 또 중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분야에 있어서도 이제까지 자료이용과 객관적인 문제접근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리영희씨는 사실탐구를 위하여 힘겨운 선구역할을 담당하여 왔습니다."
이밖에 1978년 2월초에는 기독자교수협의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한국기독학생연맹 등도 리 교수의 구속을 항의하고 석방하라는 의견을 발표했다.
리영희 교수가 연행될 때 팔순의 노모가 병석에 계셨다. 리 교수는 병석의 어머니에게 "잠깐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집을 나섰다. 기소되던 이튿날인 12월 28일 새벽, 그 어머니가 아들을 찾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8일 오전 면회 온 부인 윤영자 여사로부터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들은 리 교수는 망연자실했다.
자유를 차단당한 아들은 그날 저녁 서울구치소 4사상(上) 6호 감방에 빈소를 차리고 '감방음식'으로 예를 올렸다. 역시 구속되어 있던 김지하 시인이 사탕을 보내주었다. 그는 어머니의 영전에 바치는 편지를 써서 집으로 보냈다.
'불효자의 변'
"어머니의 영전에 바칩니다. 평소에 불효자식이더니 끝내 세상을 떠나시는 자리에서 임종도 못한 죄인이 되었으니 한만이 앞섭니다. 어디로 간다고 말씀도 드리지 못한 채 집을 나와 지금 이곳 몸의 자유를 잃고 있는 그동안 어머니가 아들을 찾는 소리와 그 몸짓을 늘 듣고 보는 듯하였습니다. 좁은 방 속에 주어지는 음식·과일을 고여 놓고 멀리서 하루 세 번 어머니의 명복을 비오니, 부디 극락 가셔서 먼저 가신 아버지를 만나 영원히 행복하시옵소서."
어머니가 별세하자 주위 인사들은 아들이 장례라도 치르고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고 당국과 교섭했다. 송건호·이호철·임재경 선생 등이 소설가 이병주 선생을 앞세워 검찰총장을 방문하고 그 뜻을 전했다. 그렇게 될 것 같았지만 리 선생은 결국 감옥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상주 없는 장례가 친지들에 의해 치러졌다.
당초 책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나는 리 선생에게 이미 발표한 글들로만 엮지 말고 새 원고를 한두 편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렸는데, 그때 새로 집필한 것이 '불효자의 변'이었다. '현대의 충효사상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는 이 글은, 이 시대에 충과 효가 어떠한 의미구조를 가지며, 권위주의 정치사회에서 그것이 어떠한 형식과 논리로 민중들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는가를 비판한 것이었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도 효도를 하지 못했고 현재 살아 계시는 어머니에게도 효도를 하지 못하고 있는 불효자이다. 선친의 마지막 병고 때에는 의사 한 번 불러 대지 못한 채 돌아가시게 했다.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가족인데다가, 이름은 언론기관이라고 버젓하지만 안에서 뒷바라지하는 소위 '내근'인 나에게는, 쥐꼬리만한 월급밖에 없는 수입으로써는 가족의 세 끼를 보장하는 일조차 힘에 겨운 형편이었다.
이 쓰라린 경험은 나에게 효도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해방 후 내려오신 아버지를 10년 쯤 모시면서 그 회갑조차 못해 드리고 이렇게 세상을 뜨게 한 뒤에야 나는 비로소 철이 들어 아버지가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럴수록 조금 살게 된 후에는 만사에 선친 생각이 앞선다.
효는 아름다운 인간감정의 행동적 표현이다. 효를 다하지 못한 필자 같은 인간은 죽는 날까지 그 못다 함을 원한으로 품고 고민할 것이다. 필자도 자식들에게는 효의 도덕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 사회의 사회적 신앙, 교육의 근본정신, 인간관계의 범주로 강조하려 할 때에는 그것만이 아닌 더 중요한 근본적 사실을 아울러 생각해 보도록 권하고 싶어진다."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단 심정으로 상고이유서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