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가 주는 친근함

연극 <녹차정원>을 보고

등록 2007.06.20 15:12수정 2007.06.2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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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게 없어서 먹고, 쓰고, 바르는 녹차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녹차가 들어간 초콜릿을 좋아하는 영재는 지체장애인이다. 그는 숨을 쉬고 있는 동안 그가 좋아하는 녹차도 점점 녹아간다. 영재의 존재는 환상 속에서 녹차의 맛과 같이 떨떠름한 맛을 남긴 채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진짜 사라진 게 아니다. 마룻바닥에 그의 발톱이 남겨져 있을 정도로 계속 남아있는 그런 존재이다. 녹차초콜릿을 마냥 좋아하던 영재는 정원에 피어있는 녹차나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계속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다.

무대 양쪽으로 방이 있고 마루가 있는 다롱이의 집이다. 마루를 넘어서면 회색빛 시멘트벽 너머로 하늘도 다른 집의 담벼락도 보이지 않는다. 마루 왼편 녹차나무와 작은 세숫대야와 수돗가가 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무대 위에 다롱이 가족을 통해 가족의 치부를 드러낸다.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라고 불리는 가족이 감추고 싶어했던 그림자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가족은 이렇기도 하다고 발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녹차가 줄 수 있는 친근함으로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얽혀 있던 형에 존재에 대해 친근함을 가장해 다가온다. 다롱이 가족이 사는 방법은 영재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오로지 형을 위해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형을 위해 다롱이가 여자친구와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여자를 소개시켜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a 녹차정원 중 한 장면

녹차정원 중 한 장면 ⓒ 배우세상

장애인이 아닌 배우가 실제로 장애인 역할을 하는 연기를 지켜보는 것은 관객에게 곤욕스럽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오아시스>를 문소리의 실감나는 장애 연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일종의 두려움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의 성에 대해 다루는 것이 하루 날을 잡아서 성욕을 해소해 주는 것이 영재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조금 더 장애인 영재의 캐릭터에 대해 한 번 더 곱씹어 주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랬다면 장애인 영재가 단편적으로 다가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의 행동들이 부담스럽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공연을 보면서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고민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것은 연출이 다롱이와 장애인 형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족이라는 전체를 다루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론적으론 연출은 가족을 택하면서 보는 사람에게 정리되지 않는 애매한 지점을 남겨준다.

그래서 영재가 녹색조명이 켜진 후, 비장애인이 되는 상상을 하면서 행동하는 장면이 분명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공연에서는 뜬금없이 끼어든 장면으로 보이면서 혼란스럽게 만든다. 영재가 혼자 신지 못했던 신발을 신고, 자신과 함께 자 주었던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평소에 하고 싶었던 초콜릿 껍질을 벗긴다. 영재가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하고 싶어했던 일들에 대해 절박했던 심정을 알겠지만 환상 속에 그녀가 존재해야 하는지도 쉽게 납득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영재는 닫힌 방문을 활짝 열고 담벼락에 서서 한 줄기 빛을 맞으면서 두 그루 서있는 녹차나무와 함께 사라졌다. 더 이상 외면할 곳도 없는 환상 속에서 형이 보여준 모습은 환상으로만 끝나 아쉬움이 남는다.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차의 기호인 녹차라는 친근함으로 장애인과 가족을 다루려 하다 보니 벅참이 느껴진다. 녹차가 주는 친근함을 가장해 가장 흔한 소재이면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가족을 다루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차라리 장애인과 가족 중에 한 가지만 택해서 치열한 지점까지 끌고 들어가 주었다면 <녹차정원>이라는 제목에 대해 배신감을 느낄 틈이 있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ot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ot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녹차정원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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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사람. 프로젝트 하루5문장쓰기 5,6기 진행자. 공동육아어린이집 2년차 워킹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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